한국일보

열심히 일해봐야 말짱 꽝이구나

2005-10-20 (목)
크게 작게
이영소(뉴저지 포트리)

세계 이 곳 저곳에서 큰 재난이 일어나고, 계절적으로는 기온이 뚝 떨어져 심리적으로 위축될 요즈음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이민자로서 지난 일년 동안 개미처럼 열심히 일했으나 창고에 쌓인 것은 별로 없다. 얼마 안 있으면 또 겨울이 닥쳐올텐데 걱정이다.그런데 요즈음 배달되는 메일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하찮은 것이지만 미국이 왜 이렇게
변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자선단체의 도네이션 협조 요청 말이다.
전화로 독촉을 하는가 하면, 메일을 보내놓고 받았느냐는 확인 전화까지 한다. 그리고 보내온 메일을 열어보면 보낼 액수를 선다형으로 표시해 놓고 하나를 체크해 달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25-$50-$100-$150 이렇게 표시해 놓았다.도네이션 액수로는 25달러도 적은 액수가 아닌데 150달러까지 표시해 놓은 무례를 이해할 수가 없다.또 한번은 아침에 가게를 오픈하고 보니 도네이션 봉투가 와 있다. 메일로 온 것이 아니라 동네 카운티에서 사람이 직접 와서 놓고 간 것이다. 몇시간 후 확인전화가 걸려왔음은 물론이다.이쯤 되면 자발적으로 알아서 내는 도네이션이 아니라 세금 징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물론
메일을 보내온 곳마다 다 보내진 못했어도 해마다 한 두 군데는 성의껏 보내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메일함 열기가 그다지 달갑지가 않다. 반갑고 기다려지는 메일이 배달되는 것이
아니고 상품 선전, 잡지 등 반갑지 않은 메일이 더 많이 배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빚 독촉장 같이 매달 어김없이 찾아드는 정규 빌까지 함께 우수수 쏟아지니까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어난다. “열심히 벌어봐야 말짱 꽝이구나. 이놈의 빌에 다 실려가는구나!”갓 이민와서는 고향에서 부모 형제, 친척들이 보내주는 정다운 사연들이 메일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이사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이름, 내 주소가 영어로 적힌 메일이 배달되는 신기함 때문에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온 메일일 망정 반가운 마음을 갖고 일일이 열어보곤 했었다.

그랬던 우편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지금은 메일함을 여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봉투마다 아라비아 숫자가 찍힌 빌이 들어있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한 번 볼까? 모기지 빌, 전기 및 개스 빌, 집 전화와 셀폰 빌, 케이블 TV 빌, 폴랜드 스프링워터, 2개 정도의 크레딧카드 빌, E-Z패스 빌, 건강보험 빌, 자동차보험, 자동차 할부금, 그리고 가게로 밀려드는 굵직굵직한 세금과 렌트 빌. 그야말로 체크 끊어 보내는 맛에 사는 이민생활
이다.그밖에 카운티 내의 예비역군단체와 소방서 등에서는 봄 가을이면 자기 동네 메인스트릿 차도에 나와 바구니를 들고 서서 왕래하는 드라이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이 나라에서 오래 살아온 자국민한테는 자선기구를 돕는 도네이션이 너무나 익숙한 연례행사이고 당연히 도와줘야 할 의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소하고 배워가며 살아가느라고 자동차 벌금티켓을 억울하게 몇백달러씩 먹어야 하고, 가게는 가게 대로 정당한 세금 말고도 뜻밖의 벌금 티켓을 가끔씩 먹어야 하는, 벌금 뿐 아니라 법정까지 나가 귀중한 시간까지 까먹어야 하는 타민족 이민자로서는 강요에 가까운 도네이션 메일을 받아보는 자체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한인 커뮤니티 여러 기구에서도 필요한 기금 조성을 위해 협조해줄 것을 바라는 곳이 많다. 머지않아 연말이 닥아오면 또 사랑의 터키 보내기며 헌 옷가지 보내기 등 불우이웃을 돕자는 행사가 이어질 것이다. 여유만 있으면야 보태주면 좋을 곳이 많다. 문제는 여유가 적어서 그것이 문제다. 차제에 방향이 좀 다른 고언 한가지를 말한다면 수많은 곳에서 ‘광고 내라’는 요구가 많다는 점이다. 끝발 없는 가게주인들 한테도 좀 선택의 여지를 주었으면 좋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