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회는 누구의 집인가

2004-10-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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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일(성은장로교회 장로)

그동안 우리들은 서울 소식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 이제는 모두 우리 앞일을 걱정할 때가 되었다. 한 핏줄, 한 고향인 조국에 대해 걱정을 안 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외쳐본다 해도 잠자는 이들이 마음을 다져먹고 일어나서 하품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평양감사도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지금 이곳에는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큰 일은 큰 일을 할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우선 작은 일들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이다.


한 예로, 롱아일랜드 어느 조용한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녁시간에 한 여인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또 다른 한인이 차를 몰고 가면서 우연히 그 여인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가느냐고. 플러싱에 가려는데 차가 없다고 그 여인은 말했다(그곳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그는 이 여인이 밤 늦게 길에서 헤맬 것 같아서 “타세요, 플러싱까지 태워드리죠” 하고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한 한인 운영의 네일가게에서 일한다는데 주인은 플러싱에 거주하는 연변, 중국 등지에서 온 여인들만 골라 자기 가게에서 일을 시키면서 상식 이하의 운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서류미비자라는 점을 악용, 툭하면 고발한다고 으름짱을 놓거나 심지어 급료를 항상 3일분씩 묶어놓고 임금을 지불하다가 따지고 들면 곧장 해고시키고, 또 일이 마음에 안 들면 이 여인처럼 혼자 남겨놓고 다른 종업원들만 차에 태워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아직도 연변의 사투리를 고치지 못한 이 여인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이런 한인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지금 우리는 미국이란 땅에 살면서 어디에서 살다 왔건, 어떤 사
연으로 이곳에까지 왔던 모두가 생활하고 있는 것이 타향살이가 아닌가.

이렇게 답답하고 억울할 때 찾아가 하소연이라도 할만한 곳이 없단 말인가. 그 많은 교회당의 문은 주일날 이후에는 모두 꽁꽁 잠겨있다. 병들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그런데도 이들이 왜 교회의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교회는 부자만 가는 곳, 건강한 이들이나 행복한 사람들만 가는 특별한 곳으로 잘못 생각하게 만든 우리들의 책임은 아닐런지?

교회는 우선 가난한 이들을 부르려고 오신 이가 만들어준 곳이다. 핍박받는 이들이 피해와야 하는 곳이요, 배고픈 자들이 찾아와 라면이라도 함께 나누어야 하는 곳이다.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교회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거룩하기 이전에 누가 교회를 세웠는가? 이 근본을 모른다면 그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목자
가 아닐 것이다.


성경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은 만민의 집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요즘 목회자들은 상당수가 하루 삼식을 다하며 배부르게 살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낼까 걱정들을 하고 있다. 이들은 금년 겨울 기름값이 얼마나 오를지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어려운 이웃을 먼저 챙기려는 마음부터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교회는 구제를 하는 기관이 아니다. 구제는 국가가 하게 되어 있는데 왜 자꾸 교회를 빈민구호소로 취급하려고 하는가고 묻는다.

만일 당신이 지금 병들고 지치고 의지할 곳이 없고 영어도 못하고 전화할 친구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없는 빈 집이라도 들어가 쉴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는가?

교회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마음놓고 찾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전이지 목회자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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