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돌아갈 집이 있음에...

2004-10-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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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가 제77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한국측 주자로 4일(한국시간) 최종 선정돼 전세계 영화와 후보작 티켓 다섯 장을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됐다. 지금껏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한국영화는 단 한편도 없는데 내년 1
월말께 후보작이 최종 결정된다.

이 영화 ‘TAE KUK GI’가 지난 3일 미 전역 33개 스크린에서 개봉되어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맘만 먹으면 한국관객 1,000만 시대를 연 이 영화를 대형 스크린에서 순수한 한국말로 볼 수 있다. 지지난 주말 늦은 시각에 동네 더글라스톤 무비 월드로‘태극기’를 보러갔다. 한국전쟁의
두 형제 이야기라는 내용과 대사까지 훤히 알고있지만 한국영화가 미국극장에서 상영되고, 그 다루는 주제가 우리 역사라 순전히‘한국인의 핏줄로서 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보러갔다.


야심한 시각이라 썰렁한 극장 안에는 100% 한인 관객이 십 여명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한국 역사 미국인들 정말 관심 없네’하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었지만 이내 영화 속에 빠지고 말았다.사실 요즘은 골치 아프고 심각한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아무런 부담 없이 영화를 즐
기고 싶으니 전쟁영화보다는 차라리 순정만화나 코미디류, 애정영화를 보는 것이 마음에 편하다. 하지만 아무리 지워버리고 싶고 잊고 싶고 피하고 싶은 역사지만 내 것이기에, 우리가 넘어가야 할, 극복해야 할 우리의 상처이기에 보기 힘들 것이라는 불편함을 각오한 터였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 싸우고 아직도 화해가 안된 부끄러운 우리 역사를 후세들에게는 감추고 싶고 몰라도 돼 하고 싶은 마음은 꿀뚝같았지만 그래도 진실은 알려줘야겠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13세 딸아이와 함께 갔다.

남동생을 홀어머니에게 돌려보내는 방편인 태극무공훈장을 타기 위해 전투에 앞장서다가 살인병기가 되어가는 형 진태(장동건 분)와 그러한 형을 말리다 못해 미워하는 동생 진석(원빈 분), 전쟁의 광기속에 영혼이 사로잡힌 형은 국군으로, 인민군으로 다시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살리기 위해 총구를 인민군으로 돌렸다가 총알받이가 되어 처참하게 죽어 간다.
그순간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서 보니 딸이 울고있었다.
“너 우니?”, “응.”, “왜?”, “너무 불쌍해.”그래, 한국 역사를 이해했단 말이지, 우군이고 적이고를 떠나 인간은 원래 불쌍한 존재임을
받아들였단 말이지. 이 비참한 한국역사를 어찌 받아들일까 눈치를 보던 나는 그때부터 마음놓고 눈물을 흘려도 되었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난 후 판단은 자기 몫인 것.“50년을 기다렸는데 왜 이제 오냐”며 머리가 반백이 된 동생이 형의 탈골된 유해를 어루
만지며 오열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가 종료되고 관람석 불이 훤히 켜지자 한인 2세들은 모두 울고 난 듯 같이 온 아버지가 등을 툭툭 쳐주는 모습들이 보였다.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이 날의 영화 관람은 아주 잘 본 것이 된다.

가장 단순하고도 큰 꿈, 구두가게를 열어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공부 잘하는 동생을 대학 보내고 싶은 바람, 그 소박함은 전쟁이 무참히 밟아버린다. 가족을 해체시키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그 짐승의 시간, 공포에 떠는 동생은 ‘이 눈앞의 현실이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그윽한 향의 모닝 커피를 마시고 나서는 기분 좋은 출근길, 하루종일 일에 시달리지만 할만한 일들, 집으로 돌아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고단한 육신을 누일 아늑한 잠자리에 드는 평범한 일상사,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돌아갈 집이 있음에 감사하자.
머잖아 긴 긴 겨울이 시작될텐데 누군가 창가에 불을 훤히 밝혀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더 이상 무얼 바라랴. 가족이라고 해서 다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지만 싸우고 갈등하더라도 남들보다 빨리 화해하지 않던가. 힘든 인생길을 함께 가는 가족, 이웃, 친구가 내 옆에 있음이 든든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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