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다시 떠오르는 ‘북핵 위기설’

2004-09-3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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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북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기대됐던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가운데 최근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의 선거를 앞두고 북한이 부시의 낙선을 위해 부시 때리기에 열을 올리더니 최근 대미 강경노선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미국도 북한에 대한 강경입장을 누그려뜨리지 않고 있다.

지난주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의 최수현 외무부상은 한국의 핵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으면 북한이 6자회담에 나가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이미 폐연료봉 8,000개를 재처리하여 얻은 농축 우라늄을 무기화 했다고 말하고 이는 북한에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핵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북한의 일관된 대미 자세가 일부 표출한 데 불과하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지난 26일 현 시기 최대의 계급투쟁은 ‘혁명수뇌부 결사옹위’에 있다면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사력을 강화하고 국방산업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또 27일에는 북핵 6자회담이 지연된 책임이 미국측에 있다고 하면서 미국이 북한 내부를 와해시키고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어떤 감언이설과 공포전략도 북한인민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8일에는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유엔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와같은 북한의 태도에 대해 미국도 만만치 않게 맞대응을 하고 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무기화 발언에 대해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의 어떠한 주장도 미국의 정책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볼턴 국무차관은 북한이 계속 6자회담을 거부할 경우 북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체제 전복용이라고 비난하는 ‘북한인권법’이 미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통과됐다. 북한의 강력한 반발이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을 시작할 때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개인이나 국가 사이의 물리적 충돌은 거친 말싸움에서부터 시작된다.

말로 상대방을 비난하여 서로 감정을 건드리면 위협수단을 강구하게 되고 위협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실제행동을 취하게 됨으로써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미국과 북한 사이에 비난전이 격화되고 있는 현 상황은 새로운 북핵위기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미국과 북한의 대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국의 국제전략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냉전시대에 자유세계의 중심국가였던 미국은 냉전이 종식된 후 동맹국의 이탈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과 이란 등의 핵개발과 특히 9.11사태 후 테러에 대처하는 공동전선을 구축, 미국이 세계의 지도국가로 군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한은 대남관계, 통일문제, 체제 보장 문제와 대미외교 뿐 아니라 경제개발의 핵심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하고 있다.

즉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분쇄하여 세계에 지도력을 보이려고 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수단으로 사용하여 대미 외교에서 승리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북핵문제로 양국이 충돌하게 되어 있다.

미국은 핵무기와 테러문제를 다루면서 리비아처럼 말을 듣는 나라는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이라크처럼 말로 안되는 나라는 무력을 행사했다.

북한과 6자회담을 한 것은 북핵문제를 일단 말로 해결해보자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는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부시의 선제공격론이 바로 이 가능성을 뒷받침 한다.

지난주 미 상원의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는 민주당 의원들 조차 북한을 강제로 무장해제하는 문제를 거론하여 미국의 군사적 능력을 질문했고 답변에 나선 주한미군사령관은 주한미군이 공수 양면의 어떤 전쟁도 수행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북한의 대미 비난이 대선과 이라크에 발목 잡혀있는 부시대통령 때리기의 일환이라면 선거 이후 다시 협상테이블에 복귀할 전망이 크다. 그러나 핵무기를 위협수단으로 외교적 승리를 거두기 위한 수단이라면 북한의 뜻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의 태도에 따라 북핵 위기설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제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위험한 게임을 하려는 망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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