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태양 그리고 대통령

2004-09-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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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리버티뱅크)

체면이나 명분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연로한 노부모 밑에서 가족들은 숨쉬기 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이런 노인의 가당찮은 오기와 독선으로 패가망덕한 예는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수하 가족들의 건의는 웃어른이라는 권위로 내쳐지고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면 경륜을 내세워 찍어 누르니 논의와 타협은 온데 간데 없고 명령 하달만이 있을 뿐이다.

비근한 예로 방학 때 손자들이 친구들과 함께 신나는 물놀이로 기대가 가득 차 있는데 할아버지가 해수욕장 벌거숭이들의 분위기가 마땅치 않아 바다 대신 산행을 강요할 경우 아이들의 실망이나 낙담이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심만 유발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흘리개 손자들의 장난감 싸움마저 그 부모들을 제치고 가장인 할아버지가 시시콜콜 참견한다면 그 노인의 아들이나 며느리는 사직서를 써야 할 판이다. 그 무력감, 모멸감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 집안이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가정이 되겠는가.

국가의 경우, 나라가 붕괴되는 것은 일견 외압이나 전쟁에 의한 것 같이 보이지만 열에 아홉은 그 내연(內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월남 패망을 반면 교사로 삼을 때 더 이상의 완벽한 예증(例證)은 없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으니 살풀이 굿이라도 해야 할지, 진보좌파네 꼴통보수에 반통일 세력임네 거품을 무는데 화약냄새만 없다 뿐 전쟁터가 따로 없다.

경제라는 애물단지가 지렁이와 함께 누워있다 보니 발에 걸리는 게 실업자요, 가정주부들이 시장 바구니를 면구스러워 하는 판이다. 하물며 보안법 폐지나 역사 청산, 수도 이전에 아무리 중하다 할자리도 목구멍의 포도청만은 못할 터인데 대통령까지 나서 사사건건 왜 기름을 부어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장자(壯子)는 “군주는 지혜가 천지에 떨친다 해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언변이 뛰어나 만물을 아로 새긴다 해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능력이 비록 세상일을 다 해낼 수 있지만 스스로 행하지 않는다. 군주가 어떤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생각하면 자연히 생각해내지 못하는 다른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 혼자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대신 남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만 하면 된다. 이렇게 군주는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안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혼자 다 하려면 총리, 장차관 모두 사표 받아 인건비라도 줄여야 된다. 보안법이 폐지되고 양키가 물러가면 공산주의자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인 데마(Demagogy)는 찬란한 햇살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訴願)과 찰떡궁합의 팔자가 된다.

옛날 같으면 정자나무 밑에서 장죽으로 등 긁으며 장기 바둑으로, 손주들 재롱으로 소일할 노인들마저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져 목에 핏줄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북한이 노리는 데마의 정수(精粹)가 아닌가. 가재 잡는데 도랑 치는 수고마저 덜어낸 꽃놀이 잔치에 김정일이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는다면 그 술 쉬어서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같은 바다라도 멸치와 고래가 사는 곳이 다르듯 세상사 품과 격이 다르고 완급이 있는데 빨리 키운다고 벼이삭을 뽑아올리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노대통령이 탄핵에서 살아 돌아온 뒤 특유의 돌파력을 발휘하지만 정치가 씨름이 아닌 이상 힘이 정의가 될 수는 없다. 한 번 패했던 장수가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승기를 잡아 모든 것을 힘으로 몰아부치려 한다면 전국민을 향한 앙갚음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의 없는 힘은 독단이고 폭력이다. 태양이 아무리 밝아도 구름을 뚫지도, 쫓지도 못한다. 그것이 천지 조화다. 민심이 태양마저 가리는 구름이라면 그것이 바로 천심인 것이다.대통령이 아니고 사해(四海)를 호령하는 황제라도 천심을 거역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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