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보 쪼다의 변(辨)

2004-09-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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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권(동부제일교회 목사)

내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아이들과 여름 내내 삼베 잠방이 하나만 입고 온몸이 새까맣게 그슬린 채 잠자리, 매미, 때로는 미꾸라지나 가재를 잡느라 강으로 산으로 한창 분주했다.

푸른 물감을 탄 듯한 섬진강이 진초록 들판을 갈라놓으며 굽이쳐 흐르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향은 차마 꿈에라도 잊힐 리가 없다.소년시절에는 해운대, 다대포, 수영, 광안리 등 바닷가에서 뜨거운 여름을 식히곤 했다. ‘존스비치’를 간혹 찾아 망망한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을 바라보다가 아득한 어린 시절, 머나먼 고국의 산천과 바다를 떠올려 보곤 한다.


대양에서부터 피안을 찾아 헤매다가 모래 한 줌 살포시 해안에 얹어 두고 다시 낭만적인 방황으로 돌아서는 바다 물결은 ‘파보(波步)’가 아닌 바보라고나 할까? 그것은 내 자신과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태평양을 건너 거대한 대륙의 언덕에 올라 숨이 턱에 닿을 만큼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뚜렷한 족적(足跡) 없이 영원한 피안의 세계로 밀려가고 있는 ‘바보’같은 삶인 것을...

고구려 역사 중에 ‘조다(助多)’라는 왕자가 있다. 그는 장수왕의 맏아들이었다. 부왕인 장수왕이 79년이나 왕위에 머무는 바람에 왕위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왕위만 지켜보다가 아들 문자왕(文咨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조사(早死)한 ‘쪼다’가 된 ‘조다’였다.

내가 어느 목사들의 모임에서 강의를 맡았을 때 ‘목사의 삼대 쪼다’를 말한 적이 있다. 첫째는 장로도 없는 교회를 시무하면서 ‘당회장 아무개’라는 명함을 박아 다니는 목사, 둘째는 설립한 지 십년이 지나도 처음 설립 때와 교인 수가 변함이 없는 교회의 목사, 셋째로 몇 명 안되는 교인들의 작은 교회를 시무하면서 학력은 다른 목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목사라고 했다. 유머로 한 말이었으나 내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절감하는 것은 참으로 나는 ‘바보, 쪼다’가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다.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바보가 되고 쪼다가 될 수만 있다면 큰 교회를 시무하든 작은 교회를 시무하든 행복하기만 할 것 같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도인 우리를 …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라 했다.(고전 4:9-13).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고 쪼다가 됨으로써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터득해던 것이다.

공자도 “자기를 몰라준다 하여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느냐(不知己不* 不亦君子乎)’라고 했다. ‘군자’가 되려면 ‘바보, 쪼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내 목회 생활에서 ‘바보 쪼다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 쪼다’ 같은 발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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