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잡초공화국

2004-09-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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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과학적인 연구과정에서 두 가지 이상이 무질서하게 섞여있을 때 어떤 특정한 것만 선별해서 처리하는 것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제 중의 하나다.

가령 체내에서 자라고 있는 암세포만 선별적으로 공격해서 죽이고 나머지 체세포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물질을 발견했다면 암은 정복된 셈이다. 또 요즈음 테러분자들이 무고한 생명을 죽일 때마다 사람들이 ‘저런
테러리스트 같은 나쁜 인간들만 골라서 죽이는 폭탄은 누가 못 만드나?’하고 탄식하는 것도 선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오래 전에 과학자들도 태생적으로 농작물 보다 훨씬 생명력이 강한 잡초만 선별적으로 제거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농작물은 보전해 주는, 마치 의협지 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제초제(除草劑)를 만들어 일손 부족한 농가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농지가 잡초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초제를 만들었듯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좌파 세력들의 판이 되어 공산주의 국가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란 것을 한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법은 남파 공작원들, 사상변절자들, 그리고 김정일 장학생들 같은 좌파 세력들만 선별적으로 색출하여 제거하기 위한 목적과 의도가 담겨있는 법이며 일반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간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이 법은 실수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범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범해지며 일회나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반복
적이다. 흔히 단독적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단체적으로 범해진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반국민들에게는 교통법규 보다도 더 관심이 없어 전혀 국민의 요구사항이 아닌데도 현정권은 다른 시급한 문제들을 제쳐놓고 집권 이래 이 법의 개폐문제를 끊임없이 정치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이를 보면서 왜? 누구를 위해?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등등의 근원적인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마침내는 국가인권위원회까지 이 법은 전면 폐지해야 된다고 나섰다. 이에 현정권의 집권 이래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대법관들까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국가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없다’는 토를 달면서 국보법은 폐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내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은 곧 이어 그의 특유한 오기 때문인지, 한국정치무대에서 좌파 세력들의 로비활동이 그만큼 드세어서인지, 아니면 전임 대통령처럼 무슨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북쪽의 김정일위원장 만나는 깜짝 쇼를 한 번 보여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망상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소문대로 한국정치는 이미 때가 늦어 인형극처럼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때문인지, 반세기가 넘도록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던 한국 정치사에서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 지켜줬던 이 법을 국가의 존폐와 자신의 정치생명까지도 함께 걸려있을지도 모르면서 이제는 폐기해야 된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법의 본래 취지와 목적과는 달리 집권자들이 자기들의 보호용으로, 상대방의 억압용으로 이용된 사례도 없진 않다.그러나 그런 나쁜 사례들 때문에 인권침해를 들먹이며 폐지해야 된다는 논리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진리적이라고 인정받는 성경을 일부의 이단교주들에 의해 악용된 적이 있다고 이 세상에서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논리다.

또 소련과 동구의 공산권이 무너지고 서방세계에서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불과 지척의 거리에서 백만 이상의 군대가 넘겨다 보고 있는데도 ‘색깔론은 냉전시대의 산물이니 들고 나오지 말라’고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남한의 반이 빨간 색깔로 변하면 한반도 전체로는 4분의 3이 빨간 색깔로 변한다는 계산을 먼저 하고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 없을지도 모른다.

오죽 나라가 위태롭다고 생각이 되었으면 이제 칠 팔십이 넘은 과거 국정을 담당했던 원로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성토했겠는가.

만일 식물세계에서도 인간세계와 같이 정치가 있었더라면 번식이 빠르고 결속력이 강한 잡초들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은 억새풀이 있다면 그는 제일 먼저 잡초들의 소원이었던 제초제를 폐기처분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시된다. 이어 농토는 잡초판이 되어 농작물은 폐퇴되고 문자 그대로 잡초들에 의한 잡초들을 위한 ‘잡초 공화국’이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이치인 것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다른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잡초공화국과 같은 형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만 남아있지 않느냐는 생각에 머리가 가볍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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