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과연 궁상일까?

2004-05-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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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특집부 차장대우)

196,575마일. 오늘 아침 출근시간까지 기자의 애마가 기록한 총 마일리지다. 이 애마는 이민 와서부터 지금까지 15년을 한결 같이 내 곁에 있어준 고마운 존재다.

평균 5년에 한번씩 차를 바꿨다고 가정할 때 차 한 대 값을 2만 달러씩만 계산하더라도 그동안 차를 두 번 바꾸는데 족히 4만 달러는 더 지출했을 터. 물론 새차 구입비용 만큼은 아니지만 한 차를 오래 타다보니 여기저기 고치느라 들어간 수리비도 만만치는 않다.


초보 운전 시절에는 초보라서, 또 운전이 숙달된 뒤에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두들 새차를 타는 것이 낫다며 차를 바꾸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굳이 한 차를 오래 고집한 이유를 대라면 솔직히 그리 대단한 것도 없다. 돈 한푼이라도 절약하려던 이민 초기에 우연히 신문에서 20~30년간 한 차로 수십만 마일씩 달렸다는 어떤 알뜰 미국인들의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을 뿐. 험한 뉴욕거리를 접한 뒤에도 맘 편하게 살자는 생각에 잠시 버려 뒀던 낡은 애마를 캘리포니아에서 공수해 오기도 했다.

기자가 차를 배신하지 않은 것인지, 차가 기자를 배신하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뉴욕에 와서도 애마는 별탈 없이 그럭저럭 4년을 버텨내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지난 24일 한국 대구의 계명대학교에서는 고령차 전시회가 열렸다. 한국차도 20년 이상 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운행되고 있는 1970년대의 고령 차량들이 전시됐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남들이 모두 갖다 버리라고 하는 기자의 애마가 앞으로 20만 마일까지라도 버텨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20달러만 내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도 잔돈이 몇 푼씩 남았었는데 이제는 기름 값이 너무 올라 같은 값으로도 눈금이 4분의3에서 멈춰 서 버린다. 혹시 차가 오래돼서 기름이 더 들어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다고 선뜻 새차로 바꿀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한국은 심각한 청년실업과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경제정책으로 이리저리 어렵기만 하고, 미국도 기름과 우유에 이어 휴지 등 생필품 가격까지 인상되면서 허리를 조여 매야하는 시기다. 특히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쉬운 요즘 같은 세상에서 고령차를 자랑스럽게 몰고 다니는 것은 솔직히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한 차를 15년 동안 타고 다니는 것을 `이제 궁상 좀 그만 떨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독자들이 현명하게 판단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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