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고교 졸업반

2004-05-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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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다들 처음부터 포기하라고 했다. 그런데 드디어 자식을 이긴(?) 부모가 되었다.12학년생인 큰 아이가 대학원서 준비를 하면서 “아이비 리그를 가서 남들한테 자랑하고 싶지만 그것은 잠시 좋을 뿐이고 졸업 후에 직장이 없는 것은 싫다. 6년 약대 공부한 다음 제
약회사에서 경험을 쌓다가 나중에 약국을 차려 약 지으러 온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살면 재미있겠다”고 했다.

상상도 못했던 아이의 말에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발치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떨어진 기분이었다.그런데 미동부 지역에서 몇 개 없는 약대를 놓고 본인은 미시건으로 가려했고 우리는 집에서 5분 거리인 세인트 존스를 놓고 격돌했다.


아이는 지금껏 가족 속에 파묻혀 있어서 독립하여 다른 환경, 친구, 분위기에서 대학시절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은 너무 멀고 너무 추워 몸 약한 네가 골병 들 것이며 6년간 집 떠나있으면 벌써 남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만류했다.

처음에는 아이가 내 뜻을 따르지 않으니 화가 났고 소리를 질러대느라 목이 아프기도 했다. “나 미시건 가면 안돼? 안되겠지”할 때는 마음이 찡해서‘그래 가라, 네 가고 싶은대로 가라’고 내심 결정했다가 나중에는 “최종 결정은 네가 해라. 이것저것 다 생각해보고 그래도 가야겠다면 보내줄께.”하고 말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어너 클라스 입학예정자와 부모 초청디너에 다녀오더니 세인트 존스의 티셔츠를 사고 싶다고 하기에 “그래 두 장 값 줄께”하자 한장값만 달란다. ‘이제 됐네’했지만 안그런척 표정 관리하느라 애먹었다.

아이들은 대학은 무조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려하고 부모는 당연하게 여긴다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도 닥치고 보니 결혼하기 전까지 옆에 두고 보고싶은 것이다.

그런데 대학 결정 이후 아이의 요구는 만만치 않다. 프롬(Prom) 파티에의 기대로 들떠서 베라왕 드레스를 일찌감치 빌려놓고 프라자호텔 파티장과 리무진에 애프터 비용, 핸드백과 구두, 미용실비 등 학교선택에 감지덕지 하여 무조건 “옛스!”하다보니 이래저래 비용이 1,000 달러에 육박해 가는데 가장 결정적인 남자친구가 없다.

“리무진에 13명이 타고 가는데 여자아이가 9명, 남자아이가 4명이야”하는 말에 “그게 무슨 프롬이냐?”했더니“여자들끼리 노는 것이 더 재미있어”한다. 그 점은 이해가 안가는 것이 아니지만 황당한 것은 따로 있다.
“왜 나와 같이 신나고 재미있어 하면서 프롬을 준비해 주지 않느냐?”는 것.“네가 파티 가는데 내가 왜 들뜨니?”하니“그래도 다른 엄마들은 안그렇다”한다.

나도 그랬을까? 성인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고 겁나고 그랬던 것같은데, 고등학교 졸업반때는 대학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대학 졸업반때에야 사회생활을 앞둔 설레임과 기대, 막막함, 어른이 된 뿌듯함도 동시에 존재했던 것같다.


‘자식은 이겨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해야할 존재’라는데 결국 자신이 결정했어도 부모의 입김이 은연중 작용한 것같아 미안한 점도 없지 않은데 아이는 한번 결정한 이상 지난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아이라 그런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데 참으로 당당하고 거침없는 점이 보기좋다. 부럽다.

한국 여성으로 태어나 한국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받았던 대우, 스스로도 뛰어넘지 못한 보수적 성향과 ‘여자가......’하는 유리 천정. 이민 1세들은 누구나 바랄 것이다. 자신의 자녀만큼은 인정, 관습에 끌려서 질척거리지 말고 자신의 앞가림을 똑부러지게 하며 자신의 길을 확실히 알고 가기를.

이번 일로 아이의 발목 잡은 것은 아닌가 하면서도 내심 또 걱정이 된다. 밤늦게까지 춤추고 놀다가 애프터 파티도 한다는데, 너무 해방시킨 것 아닌가? 프롬 파티의 들러리는 안필요하나? 그러자면 들러리 드레스 사러가야겠네.

스스로도 아이의 고집을 능가하고 부모로서 간섭과 욕심이 지나치다는 것은 알지만 ‘아이가 아직 18세가 안되었걸랑요’하고 변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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