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미군철수’ 목소리 어디 갔나

2004-05-2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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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지난 2002년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여중생 2명의 사망사건을 이슈로 그 유명한 촛불시위가 절정을 이루었다. 규탄의 대상은 여중생을 장갑차로 치여 죽인 미군이었고 촛불시위는 급기야 미군 철수를 외치는 반미 시위로 발전했다.

미국과 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대낮 서울 거리에서 미군이 폭행을 당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이후 촛불시위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 구호가 미군 철수였다. 이라크전쟁 반대 데모 때
도 그랬고, 이라크 파병 반대 데모 때도 그랬다.


지금까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북한의 전쟁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남한과 피를 나눈 형제이므로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운 나라이며 이 북한을 겨냥하여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을 반민족적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미군 주둔이 남북한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으므로 통일을 위해서도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을 이런 눈으로 본다면 미군은 당연히 몰아내야 한다. 아니 미군 뿐 아니라 한국군도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한국군이 북한을 주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주적이 어느 나라인가.

일본인가, 중국인가. 북한군이 도발해도 먼저 총을 쏘지 말라고 대통령이 지시한 나라에서 엄청난 예산을 들여 큰 군사력을 유지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에 징집하여 고생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평화를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한국은 군사력이 필요 없는 나라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주한미군의 1개여단 병력을 이라크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한국에서는 ‘안보 공백’을 우려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정부는 국방에 이상이 없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고 국회는 정부의 대책을 따지고 있다. 신문마다 한미관계를 걱정하는 사실을 긁어대고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외쳐대던 미군 철수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진다는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데 말이다.

주한미군의 일부 이동 배치는 이라크에 필요한 병력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철수 병력을 보충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감축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현재 3만7,000명의 주한미군을 앞으로 1만 내지 1만5,000명 정도 감축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정세 변화에 따라서는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다.미국의 이같은 철군계획을 보면서 멍청하기만 한 미국이 이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국가나 개인이나 이해관계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기의 뜻대로만 일을 할 수는 없다. 미국이 세계 초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세계의 말썽에 모두 끼어들어 해결사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미국이 한국에 큰 이해가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싫어한다면 떠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그냥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맞고 떠나는 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제 한국에서 미군이 물러나기 시작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촛불시위대는 춤을 추어야 할 것이다.

서울 시청앞에 잔디까지 깔아 놓았으니 수십만 인파가 몰려나와 축하파티를 하기에도 안성마춤일 것이다. 떠나가는 미군의 뒤통수에 돌팔매질이라도 하고 만세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여중생이 치여죽을 리도 없고, 소파니 뭐니 하는 법도 개정할 필요도 없다.

통일의 걸림돌이 사라졌으니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말했던 그 누구의 말처럼 통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망가져가는 대한민국호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날을 보내게 될 것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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