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 어머니, 어머님

2004-05-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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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근(무궁화상조회 회장)

갓난 아기는 5감 중에서 청각이 제일 먼저 발달한다고 한다. 엄마 품에 안겨 허전한 배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젖을 빨다가 잠시 후, 빨기를 멈추고 엄마와 눈을 맞추는 듯 빤히 쳐다본다고 생각될 때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듣던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평안함을 느낀다.

아기가 옹알이를 시작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고, ‘에구머니’ 하고 놀라는 말도 “아이고 엄마”의 준말이며, 전쟁 중 전사자들은 물론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에 마지막으로 외치는 절규 역시 엄마 아니면 어머니라고 한다.


엄마는 모든 문제의 해결사 같아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엄마만 곁에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엄마만 부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옛날이 아련한 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던 어느 날, 나는 안방을 향하여 “어머니, 우리 먹을 것 좀 주세요!” 하고 엄마에게 어머니로 호칭을 바꿨다. 잠시 후 먹을 것을 갖다주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미소와 함께 수줍어하시는 듯 하면서 만족해 하시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도 조금은 어색했었지만 이것이 내가 엄마를 어머니로 부른 최초
이고, 부모님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첫 날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엄마로부터 조금씩 변해 가셨다.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아닌 사안에 따른 해결사로, 따라서 나에게는 의무와 책임이라는 작은 짐을 넘겨주셨다. 그 짐이 날로 커짐을 느낄 즈음, 내가 군에 입대하게 되자 어머니는 다시 엄마가 되었다.

외출이나 휴가로 집에 가면 갓난 아기를 다루듯 먹을 것으로부터 입을 것, 심지어 잠자리까지 보아주시며 내 손을 꼭 잡고 이것 저것 물으시며 염려하시는 엄마로 되돌아오신 것이었다.

엄마에서 어머니로, 또 다시 엄마로 오락가락 하시던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한 나로 인해 어머니는 엄마의 자리를 영영 버리시지 못하셨으리라고 생각하면 그 불효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었는데 그 역시 엄마는 다 덮으시고 86세를 일기로 생전에는 다시 뵈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어버이날에 자식들로부터 감사와 사랑이 담긴 꽃바구니를 받고 보니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 옛날, 어머니로 격상해 드렸던 엄마를 다시 어머님으로 격상해 드리면서 조용히 불러 본다.

어머님, 70년 동안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맴돌던 엄마를 생각하면서 내 팔에 안겨 새근새근 잠드는 오래 기다리던 외손자에게 엄마의 그 모든 것을 전하며 나만이 갖는 듯한 기쁨과 행복을 어머님과 함께 나누고 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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