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삶도 죽음도...

2004-05-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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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최제창 박사가 지난 7일 별세했다. 향년 97세.그분과의 인연은 10년이 넘었다.1993년 초 뉴욕한국일보에 한미의학사 연재를 시작하며 워싱턴D.C. 인근 알렉산드리아의 자택으로 찾아가 인터뷰를 했었다.

당시 86세였는데 한국 현대의학사의 공백 부분인 8.15 해방직후 미군정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의 보건의료 개혁과 실태에 관해 증언하고 재미한인의사회와 주류사회에 저명한 한인의사들을 소개하겠다는 의욕이 대단하셨다.


그는 1907년 개성에서 태어나 27년 도미해 버지니아 의과대에서 고학으로 공부한 후 귀국하여 미군정시 보건후생부 차관을 지냈다. 50년 재도미, 75년 재미한인의사회 창립 및 회장으로서 지금의 한인의사회 기틀을 잡아놓으신 그분은 전미 수천명 한인의사들의 대부였다.

당시 수수한 살림살이 중에도 2층 서재에 마련된 한미의학사 관련자료가 어찌나 산더미 같은 지 향후 3년간의 신문 연재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인터뷰 후 한식당 우래옥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새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양복을 단정하게 입으시고 직접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갔다.

그후 최 박사가 초고를 보내면 원고를 정리하여 1주일에 한번 통판으로 나온 한미의학사는 96년 책으로 묶어져 한국의 전 도서관과 대학에 배부되었고 인세는 의대생들의 장학금이 되었다.

그후 1년에 두어 번 워싱턴 친척 오빠네 집에 가는 길이면 알렉산드리아 자택에 들러 최박사를 만나뵈었다.그동안 고우신 부인도 돌아가시고, 얼굴에 노화현상인 열꽃도 생기셨다. 거동이 불편해 2층집에서 단층집으로 이사하는 등 신문 연재가 끝난 후에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았다. 늘 일거
리를 찾아 미주한인이민 100주년 전국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아 본보에 원고도 쓰고 주미공사관 건물 매입운동에 앞장서고 골프도 치는 등 참으로 부지런하게 사셨다.

마땅히 장례식에 가야 했으나 이번에는 갈 수가 없어 부고 기사를 쓰며 그분에 대한 추억을 정리했다. 십여년 전 본보에 연재되는 한인사회 올드 타이머난을 담당했기에 그후 인터뷰 했던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부고 기사를 종종 쓴다. 지병으로 돌아가신 무용가 진수방 할머니나 토마스 정 신부님때는 어찌나 슬프던지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었다. 부고 기사 쓰기도 참으로 난감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담담한 마음으로 부고 기사를 쓴다.

나도 늙어가고 있고 사람의 죽음도 삶의 한 연장이라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몇 달 전 베이사이드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복잡하지 않고 시간도 덜 걸리고 이왕이면 넓고 안전한 출근길을 찾다가 최근에 앨리폰드 팍과 커닝햄 팍을 지나 프랜시스 루이스 블러바드, 홀리스 코트 블러바드를 지나 노던 블러바드로 빠지는 길을 알아내었다.

그 길을 가다보면 어번데일 지역의 묘지를 지나게 된다. 겨울에는 새하얀 눈꽃이 가지마다 피더니 봄이 되면서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늘상 피었다 지는데 나무의 잎마저 자주색, 연두, 진초록으로 가지각색의 색깔과 모양을 보여주니 이 길을 지날 때면 일부러 천천히 달린다.


처음에는 묘소를 바라보는 이 동네를 지나며 바람불고 비오는 어느 날 밤 길 잃은 영혼 하나가 이층 창문을 똑 똑 두드리지 않을까 하는 괴기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 보아도 묘마다 화사한 꽃다발이 놓여있는 잘 가꾸어진 그 묘소는 동네의 산책 장소로서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가 있겠구나 싶다.

사람들은 이승을 떠난 자의 이야기를 하고 그와의 추억을 되살리고 그가 살다간 흔적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사니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도 또다른 형태의 삶으로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한 그의 삶은 연장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부고 기사 쓰는 일이 어렵지 않다.취재를 하며 만난 80, 90이 넘은 분이 줄줄이 있어, 앞으로 부고 기사를 쓸 일도 줄줄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삶도 죽음도 사람의 일상사라 여기니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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