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이라크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2004-05-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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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이라크의 포로에 대한 미군의 잔학행위가 일파 만파로 번져 미국과 부시행정부를 사면초가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사태는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종전을 선언한 후에도 이라크 저항세력의 반격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미군의 피해가 계속 발생하면서 국제적으로 미국의 위신이 날로 떨어지고 있었고 미국인들에게는 미국이 또다시 수렁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베트남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발생한 포로 고문사태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는 아랍권에 속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을 옹호해 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잔학행위를 보고는 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런 사진이 촬영되어 전세계에 모두 알려지게 되었을까. 이 잔학행위는 그 행위 자체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군에 문제가 있고 미국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시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는 전쟁과 함께 늘 따라다닌 문제였다. 고대와 중세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면 집단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전쟁포로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해야 한다는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세계 1차대전이 끝난 후 1929년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가운데 세계 2차대전을 겪자 전후인 1949년 전쟁 등 무력분쟁의 참화를 줄이기 위한 제네바협약에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이 포함되었다. 제네바조약은 전쟁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보호해야 하며 보복조치를 금지하고 억류국 군대와 동일한 군법과 군사재판을 적용하고 포로에 대한 살인이나 비인도적 대우를 한 자는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잔학행위가 근절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보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 중에 적에 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는 포로를 심문하게 되고 심문과정에서 순순히 대답을 하지 않을 경우 고문이나 잔학행위를 동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이라크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는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포로를 관리하는 미군 개인들의 작태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포로를 발가벗겨 개처럼 목에 끈을 매서 끄는 것이라든지, 성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 등이 일종의 변태 또는 정신병적인 행위로 보인다.

이 포로 잔학행위는 미국의 명분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미국은 걸핏하면 인도주의와 자유수호, 세계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내건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아프간과 이라크를 공격한 것도 이러한 명분으로 합리화 했다. 그런데 비록 소수의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더라도 미군에 의해 이같은 만행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미국이 내세우는 명분에 먹칠을 하기에 충분하다.


명분 뿐 아니라 실리 면에서 미국은 너무나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확산된 반미주의와 반전주의가 이 학대사건으로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특히 아랍권의 반미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켜 미국에 대한 테러 위험이 더욱 증대되었다.

국외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이라크전쟁에 대한 염전사상을 부채질하여 대선을 앞둔 부시대통령을 곤경에 몰아넣고 미국의 국민적 화합을 해쳐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이라크 잔학사건의 후유증을 수습하는 일이다.

이 사태에 대해 부시대통령이 사과를 했지만 사과만으로는 미흡하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관련된 군인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워싱턴 정가와 언론에서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미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국방장관이 져야 하며 앞으로 이와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개선과 함께 교육을 강화해야 하며 미국이 전세계를 향해 인도주의와 자유수호의 명분에 더욱 충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선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있는 한 이런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미국이 전쟁을 계속하는 한 포로를 다루어야 하고, 포로를 다루는 한 문제가 재발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에서는 저항력이 수그러들기는 커녕 더욱 거세져서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미국이 더 이상 이라크의 수렁에 빠져 발목이 잡히기 전에 적기에 이라크를 빠져나오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 포로학대 사건은 미국을 살리는 쓴 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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