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줄 것 주고 장사 못하나

2004-05-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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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취재부 차장)

지난 98년 봄쯤이었다. 맨하탄의 169노조는 소호 빌리지에서 한인 청과 및 델리업소를 상대로 노동법 준수와 노조가입 등을 내걸고 출정식을 가졌다.

당시만해도 미국의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직원 4~5명, 많아야 10명 안팎의 소규모 자영업소에까지 손길을 뻗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경각심을 울리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했는 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후 노조가 불매시위와 함께 업소를 당국에 고발하고 나서자, 한인 업소측에서도 맞대응 시위를 벌이는 등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미국 언론에 이같은 문제가 여러차례 보도됐으며 많은 한인 업소들이 최저임금과 오버타임 등 노동법 위반으로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결국 주검찰청이 단속 위주보다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고, 2002년 엘리옷 스피처 주검찰총장의 적극적인 중재로 뉴욕한인회와 노조, 히스패닉계 인권단체 등이 함께 모여 ‘청과 행동지침’이라는 노동법 준수 서약을 하면서 일단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일단락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주노동국과 민사소송을 통해 다시 노동법 문제가 불거졌고, 대상 업소도 청과나 델리업소에서 대규모 세탁업소로 확대되었다.

최근의 단속 및 고발은 한인 업주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면도 있다. 관행처럼 이뤄지던 기존의 임금 지불 방식이나 종업원 출퇴근 관리 등의 문제가 단속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줄 것보다 더주면서도’ 법 규정에 어긋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수년간 지속된 일련의 노동 문제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일부 한인 업주들의 인식이 법 기준에 따라가지 못할 때였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히스패닉계 종업원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불법체류 직원에 대한 임금 차별, 노동규정을 무시한 획일적인 임금 등은 언제든지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169노조가 대규모 출정식과 함께 처음으로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인근의 한 한인 청과업주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대뜸 나온 대답이 ‘줄 것 다주고 장사 못한다’는 것이었다. 최저임금을 제대로 지불하면서 수지가 남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전히 많은 한인 업소들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줄 것 다주고 어떻게 비즈니스를 하는 것일까. 가뜩이나 경기도 어려울 때 임금까지 높아져 수익이 줄어든 것이 분명하지만 노동법 위반으로 아예 문을 닫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미국에서 노동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고 중요한 이슈다. 어차피 지켜야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합리적으로 이에 맞게 운영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낫다고 생각한다.‘줄 것을 다주는’ 것이 아니라 ‘줄 것은 주고’ 비즈니스를 한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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