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녹색의 그리움이 무르익으면

2004-05-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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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맨하탄의 불빛을 조용히 바라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눈 앞에서 채 마르기도 전에 벌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저 잘 생긴 젊은 사람들, 빌딩이 흔들리는 고층건물의 밀폐된 사무실에서 하루의 낮시간을 다 소비해야 하는 저 꿈많은 젊은 사람들, 측은하다는 말은 바로 거기 그 얼굴에 버즘으로 여기저기 번져있는 것이 아닐까?

맨하탄에서 바라보는 뉴저지쪽은 회색의 빛깔 아래에서 조용하나 뉴저지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맨하탄은 사정없이 바쁘다. 십자로의 신호등도 하루종일 바쁘다. 사람들이 바쁘니 승강기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덩달아 바쁘고 한가롭게 여유를 즐겨야 할 관광객도 바쁘다.


왜 그럴까? 특별히 비위를 맞추어야 할 사람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살아가는 인생수첩에 바쁘게 꼭 기록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일까? 집에 돌아와 마음이 답답한 어스름 저녁이면 뉴 가나안 기차 종점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지금 막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손에 가방을 든 사람들,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겠지만 옷차림이 말끔한 사람들은 어디를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가방 대신 무엇을 두 손 가득히 들고 오는 것일까? 이야기겠지, 잊고 싶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 오늘 밤, 가슴에 품고 잠들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있겠고 내일을 바라보는 간절도 두 손에 들려있겠지..

날이 어둡다. 조금 전에 도착한 기차는 종착역 바로 전의 달맞이란 정거장을 지나 왔겠지. 언덕 위의 작은 정거장, 몇 사람이나 내렸을까? 몇 사람이나 날 저문 역사 작은 마당에서 서너살 된 아이의 눈동자처럼 맑은 그리움을 앞세워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움이 고여있는 곳으로 아직도 와야 할 사람이 더 남아있는지 역전 광장을 밝히는 등불의 눈이 커진다. 광장을 밝히는 저 등불이 과연 따뜻할까? 머리를 들어서 차디찬 등불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차디 차고 어렵더라도 해가 뜨면 세상은 밝고 따스한 맛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집을 나와 행길에 서면 아까까지는 따스하던 세상에 더운 맛이 사라지고 찬기가 끼어든다. 그래야만 세상은 살아지는 것일까?

따뜻하고 환한 것, 바로 사랑, 잃고 싶지 않은 것 다 잃어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 따스한 것, 누구에게나 한 줌의 사랑은 있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은 사랑이 저절로 지켜지거나 사랑이 스스로 힘을 내지 않는다는 거야, 보리의 녹색이 더욱 푸르게 색깔을 더해가는 데에는 사랑이 동반하는 삶의 노동과 사랑에 바치는 절대적 희생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일의 열매 때문일거야.

노력이란 간을 맞추려는 것이지. 간을 맞추면서 사는 인생, 그래, 그게 행복이지. 심심한 데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 뒤에 오는 안정 속에 평화가 있지. 세상살이에 허탈한 사람들은 세월이 무심하기 짝이 없는 한 줄기 소슬바람이라 하지만 삶은 노력의 조형물이다.

쓰라림과 서글픔을 비켜가려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 아슬아슬하게 방법을 시행하는 노력의 조형물, 살면서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들을 보면 시원치 않은 노력에 커다란 기대를 바라거나 능력 밖의 큰 무게를 굴리다가 오히려 그 무게에 눌려 압사를 당한다.

착실한 사람들은 길이 이미 있어도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새로운 길을 만들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는 진행이고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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