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책임감과 책임 회피

2004-05-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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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거지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 있다 하여도 신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권력이 있고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비율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허무함과 책임감이라는 어설픈 명제를 내세우며 그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곧잘 ‘내가 책임진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리고 이것까지가 나의 책임이라고 발뺌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개인적인 일이라면 책임을 지지 말라고 해도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지만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일의 덕목은 ‘책임감’이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라도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은 조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 책임감이 있다는 것은 적당히 책임을 면하면 된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 시작한다. 매사에 열의와 성의를 다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모든 진행사항을 미리 준비하고 재확인 한다.

평소에 약속은 사소한 것이라도 틀림없이 지킨다. 어려운 부분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양해를 구한다. 자신의 잘못은 솔직하게 시인한다. 모든 과정을 일관성 있게 말하고 행동한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어려서부터 들어오고 보아온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라는 물결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어디로부터인가 실종되고 있다. 책임진다는 것이, 나 하나 죽으면 된다는 생각 뿐
이다.

‘책임’ 개념을 정의할 때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의 관계 개념이라는 점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대상이 되는 존재와 그 앞에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을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이라는 개념은 결국 행위의 주체와 그의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영향이 미치는 대상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주체와 대상, 즉 객
체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지는 개념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여러 다른 이유와 의미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롯 유다와 대제사장과 장로들, 빌라도의 등장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 전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그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예수님을 죽인 범인으로 나타나지 않으려고 한다.

다 숨고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에 대해서 아주 비겁하게 행동하고 그 죄를 회피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죄를 더할 뿐이었다.

먼저 가롯 유다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의 죄를 면해보려고 한다. 그는 예수님을 판 댓가로 받았던 은 30을 다시 돌려주려 하지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돈을 돌려받으려고 하지 않자 그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버린다. 자신이 예수님을 팔고 받았던 돈을 돌려줌으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던 죄가 어느 정도 무마될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자신도 그 정도로는 자신의 죄가 덮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살함으로 자신의 죄를 감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가롯 유다의 이런 행동으로 그가 책임을 졌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서 그 일을 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다수 속에 자신들을 숨기고 자신들의 죄가 보호받을 것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예수님을 못 박는 일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사람들 눈에는 감추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그들의 죄가 감추어질 수는 없었다. 그들의 무리를 지어서 일을 꾸미고 더 많은 다수를 동
원해서 죄를 짓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도 가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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