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껌값

2004-04-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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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우리는‘껌값’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도와주긴 주어야 할텐데 자신도 형편이 어려울 때, 혹은 별로 도와주고 쉽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체면상 그저 성의만 표시했다 하자. 남들이 보기에는 그보다 더 제공할 여력이 있음에도 기대 이하다 싶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액수의 돈을 말한다.

북한 평안북도 용천 대폭발 참사 이후 국제사회의 지원 물결이 쇄도하고 한국은 물론 뉴욕 한인사회에서도 성금기탁 및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정부와 민간단체의 구호물자가 인천항 배편으로, 항공편으로 속속 떠나고 있다. 미국은 지난 26일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 지원방침을 발표했다.백악관 성명을 통해 사고 4일만에 나온 대북지원 계획으로 정치적 목적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내는 성금이라 한다.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미국이 10만 달러의 재정적 지원 통로로 적십자사를 택해 인도주의적 긴급 구조의 뜻을 강조하는데 그야말로 생색내기 껌값이라 안할 수 없다.경제 규모가 미국에 비해 코끼리에 비스켓도 안되는 러시아도 50만 달러 이상, 중국은 1,000만 위안(약 15억원) 어치의 구호 물품을 제공했으며 오히려 미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단체는 수십만 달러 의약품과 식품으로 대참사를 빚은 용천에 성원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미주동포들이 참여하는 성금이 봇물을 이룰 조짐인데 아마 크게 성공한 개인이 10만달러 성금을 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미국이란 세계 최강대국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10만달러 지원에 대해 ‘소박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미 최고 언론사 스스로도 ‘너무 적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적대국 북한 핵문제가 걸려있는 정치적 입장 때문인지, 아니면 오는 5월 중순 열리는 3차 6자 회담을 앞둔 정치적 제스처인지?

인구 13만명의 작은 도시로 약 1만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용천은 평양과 중국을 잇는 중요한 수송선상에 있는 곳인데도 이번 사고로 매스컴에 드러난 철저히 낙후된 환경과 원시적 운반수단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폭발 사후 처리를 하는 현장에서 삽으로 잔해를 치우고 가재도구를 싣는 소달구지도 눈에 뜨인다. 이 시대에 웬 달구지가?

그것을 보고 ‘낭만적’이라고 말실수한 한국의 한 장관도 있었지만 그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응급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링거도 못 맞고 침상이라 할 수 없는 바닥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같은 인류로서 더구나 같은 피를 나눈 동족애로서 누구나 도와주고 싶을 것이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한국민은 물론 해외동포, 특히 미주동포들의 관심은 지대하다.미국에 살면서 음으로 양으로 이곳의 혜택을 받고있는 우리들은 좌충우돌하는 북미관계를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진 못한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말하여 북한을 자극한 것이나 핵 보유 의혹으로 ‘쿠바형 해상봉쇄’로 북한의 항복을 받으려 한 계획 등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미주 한인들로서는 이번 용천 폭발사고에 미국이 적극 나서 도와줌으로써 북미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싶다.

그런데 당사자인 미국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그러다가도 참사 당일 용천 주민들이 가족의 생사여부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챙기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이 결국 허사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싶은 의혹도 생긴다.

그런데 이‘껌값’이 실제로는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수많은 식품 중 무게나 부피를 기준으로 하면 가장 비싼 것이라고 한다. 계산대 바로 앞에 있어 만만하게 보여도 계산을 하던 소비자가 거스름돈으로 쉽게 사는 상품이므로 덩치에 비해 가장 비싼 슈퍼마켓의 효자상품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이‘껌값’이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효자상품’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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