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용어가 된 영어

2004-04-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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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관)

오늘같은 국제화 시대에 영어는 이제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다. 나라의 공무원이나 국제관계의 일을 다루는 민간에게도 영어는 이제 한 공용어일 뿐이다. 나아가서 지금 공사(公私)를 불문하고 국제관계가 아닌 일이 어디 있는가?

지금 한국에서는 영어를 배우려는 붐이 일고 있는 모양인데 이는 분명히 시대 조류에 따라가는 긍정적인 일이다.우리나라가 사교육비로 지출하는 돈이 세계의 최상위급에 속한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영어의 해득 능력은 세계의 꼴찌에 든다고 한다.


우리의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은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영어 구사가 서툰 축에 들어간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부끄럽게도 현실이다.영어가 이처럼 이미 공용어가 되어버린 데도 불구하고 가끔 나라에서 내보내는 국제회의 참석자 중에는 영어를 해득하지 못하는 대표가 참석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들이 영어 해득이 불가능하거나 부족한 것을 눈가림하느라고 통역을 쓰지도 않는다니 언제 또 사고가 터질지 시한폭탄을 장치해 놓은 격이다. 국제회의에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을 참석시키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 문제는 나라에서 영어의 해득 능력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없고 국제회의에 이런 능력을 모르는 체로 사람을
내보내는 데에 있다.

2001년 1월 초의 어느 날, 김포공항을 아직 국제 공항으로 쓰고 있던 때에 15cm의 큰 눈이 오는 날이 있었다. 이 눈 때문에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모든 비행기편은 장거리 몇 편을 제외하고는 전부 취소되는 소동을 빚은 적이 있다.

나는 이날 그나마 운이 좋아 무려 13시간이나 연발하는 뉴욕행 비행기를 밤 11시에 탈 수 있었다. 나는 열 몇시간을 공항 청사 안에서 보내면서 상상할 수 없는 괴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공항 안내방송이 드문드문 상황안내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항공기의 취소 방송을 한 다음부터는 기이하게도 방송은 한국어 방송 뿐이고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방송은 하지 않았
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외국인들은 항공사 카운터로 몰려가 항공사 직원을 찾았으나 항공사 직원마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없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다니면서 상황을 알아보느라고 난리가 났다. 국제공항이라는 곳에 외국인들이 상황을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방송을 하지 않고 안내 카운터가 문을 닫았거나 직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다니 어
찌 이를 국제 공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일이 지난 다음 항공 관계자들로부터 그 이유를 설명듣고 나는 너무 기막히고 부끄러워 차라리 울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공항방송을 담당하는 직원은 항공기 결항이라든가 지연 등 일상적인 방송은 할 수 있지만 이 날 같은 특수상황에 관해서는 방송을 할만한 영어 능력이 없어 방송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한 승객은 항공기 결항관계로 청사를 떠나기 전에 구입한 물품을 반드시 환불하고 난 다음에야 청사의 보세지역을 떠날 수 있다’고 하는 따위의 특수 방송은 영어로 방송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서의 책임자는 다른 방도를 찾았어야 마땅할 터인데 간부들은 아무도 개의하지 않고 나 몰라라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외국인들은 이정표 없는 아프리카 정글을 헤매듯 난리를 치르게 되었고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서는 한국에서 겪은 이 기막힌 사연을 평생을 두고 이야기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모든 분야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영어 해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있는 이런 기가 막히는 문제들을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야말로 문제다.

국제공항에 영어에 능통한 방송직원이 자리하고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지도자들이 외국 기자와 영어로 자유로이 기자회견을 하는 때는 언제쯤일까?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외국인과 자유로운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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