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주평통위원 사임의 변

2004-04-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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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격(뱅크오브아메리카 AVP)

나는 지난 8기(1997~99년)부터 11기까지 4기 동안 연임하고 있는 민주평통위원 사퇴원을 제출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하니 이 자리에서 중도에 사임할 수 밖에 없는 사유 한 줄 쯤은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미국에 온 후로 생업에 충실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감사할 일들이 어디 한 두가지 이겠는가마는 가까이는 내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20세기 초 중국인이나 아이리시 또는 이탈리아인이 겪었던 사회적 차별을 당하지 않는 시대 상황에 감사한다.


또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어려움 없이 미국인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버젓한 직장에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또 멀리는 한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피와 땀을 흘린 뜻있는 인사들과 기업가, 정치가들에 감사한다. 또 후진국 대열에 있던 대한민국을 근면과 창의력으로 중진국 선두에 올려놓은 기업인들에게 감사한다.

50~60년대는 군사원조, 경제원조를 제공하여 주었고 70년대 이후에는 거대한 시장을 제공하여 주어 한국의 경제 자립을 도와준 미국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현재 국내외에 ‘감사’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아니 많다.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통치자와 기업인들이 국가의 부를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분배를 주장하였고 분권을 주장하며 반미를 주장하고, 민족 공조를 주장하여 왔다.

그들이 지금 와서 분배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그런 그들이 나라를 만든 순국 선열들을 폄하할 수 있는가? 역사를 인정하려고도, 배우려고도, 바로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수가 있겠는가? 미래란 과거와 현재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개혁이란 단어가 멋이 있게 들릴런지는 모르나 그 처방은 역사를 정확히 분석하여야 나오는 것이다. 역사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하는 것은 곧 낳아준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는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권력의 핵심부까지 장악한 소위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는 인사들 가운데에는 친북 성향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民主)란 무엇인가? 나라의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는 뜻이다. 백성을 탄압하고 독재를 오십년 가까이 종신토록 자행하였던 김일성이나, 전제 왕권에서나 볼 수 있는 세습통치를 하고 있는 김정일 일파에게 경도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민주화 운동권들이 왜 주체사상을 흠모하여 왔으며 전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철권통치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독재 집단에게 온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이주의 자유는 물론, 언론의 자유, 통신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마저 없는 북한의 정치수용소에는 수백만이 수용되어 있고, 인민의 태반이 영양실조이거나 굶주리고 있으며 탈북자들이 줄줄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인류가 가공할 만한 핵무기를 개발하여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집단이 갱의 집단, 악의 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온 몸을 바쳐 일생동안 반탁 반공의 일선에 서있는 素石 이철승 선생이 비통한 심정으로 “오! 대한민국 누가 지키리” 라는 책을 저술할 수 밖에 없는 형국까지 다달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의(信義)가 중요하다. 미국은 한국을 풍전등화, 적화 일보 직전에서 구해 주었고 지금은 한국 수출상품의 거대한 시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런 미국에 어찌 등을 돌리려고 하는가? 바로 그들이 국익을 위하여 바른 사고(思考),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있는가 묻고 싶다.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 하였으니 역사를 외면하고 현실과 국제관계를 직시하지 못하고 환상을 정책화 하려는 사람들의 조직에 동조할 수 없기에, 필부에 지나지 않은 나는 이를 좌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음을 참담하게 생각하면서 그 많은 선열들이 목숨 바쳐 건국하고 지켜온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정권에 따라 변질되어가는 헌법기관인 민주평통 자문회의 자문위원 직을 사임이라는 방법 이외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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