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의미있는 노년의 취미생활

2004-04-2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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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녀(수필가)

요즈음 아침 저녁으로 우리집에서 나오는 프렌취 혼의 빽빽대는 소리가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든다. 아마도 마누라가 없는 낮 시간에도 틈만 나면 소리가 날 것이다.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편이 그동안 직장일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을 낼 수 없어 키우지 못한 취미를 하나 가져 보겠노라고, 공식 은퇴를 선언하고 난 며칠 뒤부터 국민학교 어린이처럼 악기를 붙
들고 씨름을 시작한 것이다.

레슨을 받고 온 첫날에는 온갖 힘을 다해 소리를 내 보려고 하지만 소리는 아니 나고 쉬쉬 바람소리만 나더니 요즈음에는 그럴듯한 소리를 낸다.
친구에게서 악기를 빌려쓰는 일이 좀 불편해서인지 매일 인터넷에 들어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경매에 값도 써 넣어 보고, 여기 저기 악기점들에 전화도 하고, 혼을 부는 친구와 함께 악기점에 들러 어떤 것을 살까를 타진해 보고 있다. 마누라에게 값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악기를 사기 위해 설득 작전을 하고 있다.


정말 계속해서 연습하게 될까. 한두달 하다가 ‘아무래도 일을 다시 하고 싶은데’ 하고 전처럼 시간을 온통 일에 바치면 그 악기는 우리집 걸을 자리도 없는 한쪽 벽에 장식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늙어서 허파에 기운이 빠져 소리를 낼 수 없게 되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에 비싸지 않은 것을 사도록 권유해 본다.

마누라가 바깥에서 농부 일을 해도 도와주지 않아 섭섭해 할 정도로 책 속에 파묻히는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아마도 무언가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는 아쉬움이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가 보다.

주위분들의 말에 의하면 은퇴하게 되면 위축되기도 하고 별로 중요치도 않은 일에 분주해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해도 “우리는 그러지 않을거야”라고 생각해 왔었다. 알재단(미술인 지원) 일도 도와주고 동네 가까운 곳의 골프장에 운동삼아 골프연습도 갈 수 있고, 바닷가에 나가 산책도 하면 좋고, 책 읽기 좋아하니 타운 도서관에 들려 없는 것 없는 도서관 시설 실컷 이용할 수도 있고, 친구도 가끔 만나면 좋고, 교회행사에도 참여하고, 여행도 가고, 무공해 채소를 가꾸는 밭농사 일도 도와주고, 그 외에도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일만 가지고는 아니되는 모양이다.

누군가와 아닌 혼자서 자기를 표현하고 달랠 수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일이 있어야 했나 보다. 시간 보내기로야 소파에 앉아 종일 텔레비전 보면 되고, 몇가지 신문들을 읽다 보면 하루가 갈 것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정보와 오락물을 즐기다 보면 때 찾아 음식 먹는 일도 깜빡 잊을 정도일 것이고...

못할 일이 거의 없는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남편이 악기를 붙들고 기를 쓰며 연습을 하는 것을 보니 자기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취미가 있어야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전문가의 수준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 보일 필요도 없고, 몸과 정신이 허락할 때까지 자기를 표현할 수 있고, 몰두할 수 있는 특기나 취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슬픔과 기쁨을 표현해 보고 외로움도 달래보는 방법을 일찌기 찾아내어 연습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온다. 즉, 나이가 들수록 행동범위가 좁아지니 결국은 자기 혼자서 자기를
기쁘게 하고 나날을 허전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취미가 기술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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