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2004-04-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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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과거에는 저질의 대명사가 한국영화였다.신분 차이로 결혼을 못하는 연인, 유부남을 사랑하여 아이까지 낳았지만 본부인에게 아이를 보내야 하는 첩실 등 그런 신파조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을 우리 할머니, 엄마들은 호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으로 인해 속이 시커멓게 탈 때 찾아갔다. 여주인공의 가슴아픈 사연에 함께 눈물을 철철 흘리고 영화관을 나서면 속이 어느정도 풀렸고 한바탕 울고 나야 비로소 영화를 본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한국영화의 인식을 바꾸고 전환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88년 할리우드 영화 직배였다.미국과 유럽에서 교육받은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충무로에 입성, 새로운 감각과 칼라로 영화를 만들며 해외 영화제에서 굵직굵직한 상도 수시로 타냈다. 외화를 보며 데이트 하던 젊은이들이 한국 영화관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서편제’(감독 임권택)’의 공이 크다.


‘쉬리’(감독 강제규)는 해외시장 35개국에 수출되었고 ‘집으로’(감독 이정향)는 뉴욕과 LA 등지에서 개봉돼 호평 받았다. 링컨센터와 뉴욕 현대미술관 공동주최로 이번 봄에 열린 ‘뉴필름스·뉴디렉터스’에 초청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감독 김기덕)과 ‘스캔들’(감독 이재용)은 뉴욕타임스를 비롯 주류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미 ADV 필름은 본격적인 한국영화 배급을 주목적으로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비롯 30여편의 한국 영화를 구입, 그 중 공공의 적,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마리 이야기, 광복절 특사 등 10편을 DVD로 발매한다고 한다. 발매에 앞서 시사회를 통해 반응이 좋으면 극장 개봉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명실공히 한국 영화를 우리가 사는 동네 영화관에서 볼 날도 머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아쉬운 것 중의 하나가 잘된 한국영화를 개봉관의 대형 스크린으로 보지 못하고 비디오 테입로 만족해야 한다는 점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소망이 이뤄지기도 전에 김을 빼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벌써 2주전부터 퀸즈 일대 비디오가게에는 한국에서 1,0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비디오 테입가 일반인들에게 대여되고 있다.

‘봄 여름’이 맨하탄 2개 극장 개봉을 시작으로 미 전역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이미 오래전에 볼만한 사람은 다 보았었다. 4월2일 이 영화의 뉴욕 개봉을 앞두고 뉴욕을 방문한 김기덕 감독은 인터뷰한 기자가 이미 비디오 테입로 그 영화를 보았다고 하자 너무 놀랐다고 한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미국 시장을 겨냥하고 할리우드 배급사와 협상 중인데 이미 시중에 나온 해적판은 그 잘생긴 장동건 얼굴이 물에 부어 터진 것처럼 화면상태가 엉망이고 말소리가 웅얼웅얼 한데다 화면이 서로 엉켜서 내용 연결이 잘 안된다.

영화관에서 몰래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듯한 그 테입를 돈 받고 빌려주다니 상도라는 것은 실종된지 오래이다. 장물을 보급한 자나 그것을 빌려서 본 자나 모두 법을 위반한 것으로 한국대중문화의 미국내 진출에 걸림돌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편하고 돈이 절약된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한국영화의 발전을 가로막아도 될 것인가. 물론 미국에 배급되는 영화가 한인이 아닌 외국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한인들이 의무적으로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관객이 많을수록 상영기간이 늘어나 그만큼 우리 문화를 알려줄 기회가 더 많은 것이다.

한국 TV 드라마도 그렇다. ‘대장금’을 비롯 인기있는 드라마 마지막편은 거의 테입 두 개로 나뉘어 대여료를 두배로 받는다. 마지막회 자체가 평소보다 긴 한시간 12분짜리라서 한 테입에 한개 밖에 못들어간다는 변명이지만 20분 더 보여준다는 빌미로 1.50달러를 거저 받을 것이 아니라 하편은 무료대여 하거나 다른 테입를 하나 가져가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
이다.

이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상술에 우리는 언제까지나 손놓고 있을 것인가. 우리 영화의 파수꾼은 우리가 되어야 한다. 불법 복제 비디오나 해적판 영화는 빌리지도 말고 보지도 말자.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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