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통에 대한 우리의 편견

2004-01-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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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펜실베니아의 병원에 근무했던 한 간호사의 반복된 환자 살해사건으로 의료계와 지역사회는 경악과 충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더한 불안감과 공포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의료 관계자들의 자격 강화와 의료기관의 업무관리 시스템의 취약점을 주도면밀히 수정, 보완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역시 완벽을 기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의 행위를 솔직히 시인한 핸섬한 청년 간호사는 범죄로 드러난 자신의 행위의 동기를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담담히 말했다. 결연한 표정마저 감도는 심각한 얼굴 표정은 전문직 의료관련 종사자로서의 그의 말을 단순히 범죄행위에 대한 궁색한 변명이라 보아 넘길 수 없는 심증을 충분히 준다.


사람의 행위 뒤에는 반드시 그 행위를 낳는 사고가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며 고통받는 중환자들을 볼 때마다 이 간호사는 그의 의학적 소견으로써 어차피 살 소망이 없는 저들의 고통을 한시라도 인위적으로라도 덜어주는 것이 저들을 향한 선의의 봉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 청년에게 있어 기독교적 신관에서 나오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부재했을 것이며 고통은 새디스트적인 신이 인간과 세상에 내린 불합리한 저주로만 인식되어졌는지도 모른다.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비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악, 부조리한 실상들이 기독교적 교리나 우주관을 수용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실상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 문제에 명확한 해석을 못 내리고 회의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선한 이웃이 부당한 고통으로 신음하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 누구나 한번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픈 마음이 들 것이다. 아니, 무의식적인 원망이 이미 우리들 속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지 모른다.

필립 얀시는 그의 저서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를 통해 하나님이 왜 고통이 있는 이 세상을 허용하셨는가를 심도있게 고찰하였다. 그는 고통이 신체에 미치는 생물학적 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도덕적, 영적인 관점으로 진행하여 갔다.

고통에 무감각한 육체의 처참함과 고통이 없는 세상의 몰도덕적인 악함을 대비하였다. 고통은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서 쾌락의 감각과 가까우며 필요불가결한 것인데도 현대인들은 고통을 제거하고 정복해야만 하는 불필요한 침입자로만 간주하고 있는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소견은 참으로 괄목할만 하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인간이 남용함으로 인해 세상에 고난과 악이 들어왔고 하나님은 그의 구속사적 계획안에 잠정적인 기간 동안 악을 허락하셨으며 종국에는 심판의 주로 오신다.


대가의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인간의 행위에 대한 응보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비정서적이며 위험하기 조차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의 사고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의 원인을 이성적 사고로 캐내려는 태도를 경계하시며 오히려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큰 관심을 두고 계시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소망을 얻으며 소망 중에 기쁨을 누리는 것이 크리스찬의 삶이다.

크리스찬이 고난 중에서 가지는 기쁨의 원동력은 세상이 감당 못할 평화요 능력이 된다. 우리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몸소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스스로 전무후무한 고난을 자초하셨던 신은 결코 메저키스트적인 감각에서 이해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자발적인 사랑의 위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범죄한 청년 간호사와 평소 세상의 부조리한 고난에 대한 곡해로 인해 상처입어 왔을 많은 이웃들이 고통 속에서 빛나는 역설적인 진리를 발견함으로 인해 참 자유와 화해된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도 드린다.

박현숙(프린스톤 한인장로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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