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나도 세뱃돈을 받고싶다

2004-01-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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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맞고 보내면서 괜히 몸과 마음이 바빴다. 미국의 한인 가정은 대부분 양력 1월1일을 신년으로 맞지만 이민 1세대들은 음력설도 무시하지 못한다.

수년 전 워싱턴D.C.의 친척 오빠네 집에서 맞은 신년은 참으로 경이로왔다.30년 이상 그곳 올드 타이머로 살아온 오빠네 친척은 우리집을 포함한 두 집, 그리고 사돈집, 그외 오랫동안 알아온 지인 등이지만 각자의 직계가족이 모이면 100명 이상이 되는데 매년 집을 돌아가면서 한자리에 모인다.

음식을 산더미처럼 해놓고 어른과 아이 함께 떡국을 먹고 덕담도 나누고 게임도 하고 노래를 하며 신나게 논다.어른들은 방, 거실, 부엌 어디든 여러 무리로 나누어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아이들은 지하 놀이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비디오를 본다. 영화라도 한편 틀면 수십 명의 아이들이 대형 화면을 일제히 쳐다보느라 어둠 속에 뒤통수만 보이는 것이 영화관이 따로 없다.


1월1일 하루만 직장을 쉬므로 워싱턴에 몇 년만에 갔더니 갓난아기가 어느새 중학생이 돼있기도 하고 사춘기에 보고 이름도 잊어버린 어느 아이는 그새 결혼해 갓난아기를 안고 오기도 했다. 그날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도 부지기수다.이날 하이라이트는 단연 온 가족 세배이다.

나이가 들수록 한복 차림이 많은 60, 70대 어른 서너 명이 윗자리에 앉고 40, 50대 중년 그룹이 세배를 한다. 그 다음에는 30대 기혼, 20대 미혼, 아이들 등 세대별로 나뉘어 세배를 한다. 최고 연장자들이 윗자리를 비우면 중년 그룹이 그 자리에 앉아 세배를 받고 같은 연배와 부부는 맞절을 한다.

가장 숫자가 많은 세대는 푸르른 나무처럼 해마다 키가 쑥 쑥 자라고 있는 아이들로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나와 머리와 어깨, 엉덩이를 부딪쳐 가며 새해 인사를 한다.걸음도 제대로 못걷는 유아가 뒤뚱거리며 세배를 하면 조금 더 큰 아이가 붙잡아 주기도 하고 아이가 실수로 주저앉으면 폭소가 터지곤 한다.

세배 후에는 세뱃돈이 주어지는데 괜찮다고 안 받는다는 아이도 있고 어른이 주는 것이니 받아야 한다는 타이름도 있고 한차례 싱갱이가 벌어지기도 한다.내가 속해 있는 가장 어정쩡한 나이인 중년 그룹은 세배 전 가장 연장자인 어른에게는 잔돈을 바꾸어 미리 세뱃돈을 챙겨드려야 한다. 그리고 애들에게는 세뱃돈을 주어야 한다.

대학생들은 1년에 한번 대가족이 모이니 계속 비디오 촬영을 하는데 우리집은 뉴욕이라 저녁 전에 출발하려고 먼저 길을 나서면 차 타는 곳까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쫓아와 잠시 배우가 된 기분을 맛보게도 된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세뱃돈 얼마를 받았다고 자랑한다.
설날을 즈음하여 뉴욕의 중고등학교 동창회나 대학 동문회에서도 신년 파티들을 많이 하고 있다. 70세 넘은 대선배 중에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온 수십 년 후배에게 아기의 세뱃돈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런 풍경을 볼 때면 나도 어른 포기하고 세뱃돈 받는 어린 나이이고 싶다.

해가 갈수록 세뱃돈 드릴 사람도 줄어들고 점차 세배를 받는 입장이 되어가는 것이 때로 서글프다. 나도 어른들께 예쁘게 절하고 세뱃돈을 받고싶다. 하지만 세뱃돈 주는 사람이 그래도 나을까? 나중에 젊은이들로부터 용돈 받는 어르신보다?


동창회나 향우회, 기타 단체나 직장 내에서도 1년에 한번인 설날에는 연장자에게 절을 하고 세뱃돈을 주고받는 모습이 정착되면 어떨까?졸업 기수별로 나와서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은 비단 선배 및 어른을 모시는 일일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다.

1.5세와 2세들에게 몸으로 동방예의지국 한국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미국 땅에서 같은 한인끼리 모여 우리 고유의 예절을 나누는 것이 은연 중 2세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민병임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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