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지고 싶은 사람

2004-01-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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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왕이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나라 안의 유명한 석학들을 동원하여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여 적어오라 명령하였다. 십여년에 걸쳐 학자들이 지혜를 모아 얻어낸 말이 “인생이란 태어나서 외로워하고 병들고 그리고 죽는 것”이었다든가.

울고 소리치며 세상에 나와 만나고 사귀고 채우다가 모든 것 버리고 소란 속에 떠나는 존재인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껴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외로움’인 것이다.

외로움! 그것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재는 저울이다. 그 저울에 담겨지는 것은 사랑과 정(情)의 크기이다. 외로움 병을 치유시킬 수 있는 명약은 이것 뿐이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요,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나마도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새끼손가락 만한 사랑이라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외로움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 허기짐이요, 정이 그립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세계를 이해해 주고 말이 통하는 그러한 사람을 만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박한 소원이 될 정도로 ‘대화의 장애’ 병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삶에 지치고 시간에 쫓기고 의미를 상실한, 로봇과 같은 기계가 되어버린 현대인들, 파티장에서 음료수나 한 잔 들고 아무 의미 없는 날씨 얘기나 하는 건조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 생각될 때, 삶의 빈 자리가 폐허처럼 느껴져 스산할 때, 겨울 바다의 썰렁함이 가슴에 구멍을 낼 때 우리들은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내가 본 적이 없는 먼 풍경을 그리워하게 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친구’나 ‘관포지교’의 이야기 속의 믿음, 대가 없는 우정, 명나라 작가 퐁몽룡의 단편소설 ‘유세명언(喩世明言)’ 속의 법거경과 장려의 목숨을 던져 지키는 약속, 화가 고흐와 고갱이 편지로 나누었던 맑은 영혼의 외로운 절규의 대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동병상련의 우정! 이런 것들이 그리워진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따뜻한 가슴이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과의 인연이 아닐까. 사랑과 우정은 어느 것 보다 삶에 중요하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 사랑은 지극한 정성, 사랑은 기적을 낳고 생명을 창조한다.

우정 만큼 아름다운 인간의 감정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렸을 때만 가능하기에 우리를 적막케 한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껍질은 두께가 더해가고 때가 묻고 이기적으로 변한다.


우정은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정은 쌓아가는 것, 꾸밈 없는 진실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한 열정과 존경에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음과 가치관이 통해야 되는 것이다.

숨돌릴 틈도 없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는 묵직함과 신뢰를 주며 나의 영혼과 가슴에 귀를 대고 마음의 빗장을 열어 영혼의 메아리를 들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공허한 마음, 목마른 영혼, 내 마음이 질서를 잡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한 웅큼의 슬픔을 쥐고 익숙한 아픔을 늘 마시며 권태와 친해져서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가도 악착같은 세상이 나의 설익은 평안에 시비를 걸 때 문득 생각나는 얼굴, 그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게 관심을 가져주며 나의 재능과 장점을 찾아내 그 가치를 높여주고 허물을 덮어주며 말없이 내 등 뒤에서 울타리를 쳐주는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언제 신어도 내 발에 잘 맞는 오래된 신발같은 너무나 편한 사람, 그와 함께라면 칠흑같은 밤, 험한 길이라도 선뜻 따라나서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나와 늘 함께 하며 경쟁을 격려로 나의 꿈을 밀어주고 웃음과 매력과 여유로 젊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삶이 나를 기만할 때 나의 손을 잡아주고 내가 독선에 빠졌을 때 겸손을 선물하고 ‘옳소’ 하고 세상이 나를 부추길 때 ‘아닌데...’하며 조용한 눈길로 천천히 고개를 저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서글픈 한국을 가슴에 품고 수고를 희망으로 엮어가는 이민의 삶, 어줍은 자유와 평등 앞에서 객(客)이라 느껴질 때 입은 옷 그대로 아무 때나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 마시며 허전한 맘 털어놓고 나서도 행여 말이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당신이 있어서 내 인생 더없이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가지고 싶다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해야 되리라. 살의 궁극적인 질문도, 대답도 이것이기에.

조광렬(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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