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2004-01-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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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경기에도 잘 나가는 비즈니스가 있고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 송승환과 강익중을 살펴보자. 비언어 퍼포먼스 ‘난타’(영어명 쿠킨, Cookin)가 드디어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미네타 레인 시어터에 전용관을 마련하고 오는 2월20일부터 장기공연에 들어간다.

한국의 뮤지컬이 태동하던 80년대 초반, 내가 이 난타 제작사인 송승환 대표(PMC 프로덕션)를 처음 만난 것은 패션담당 기자와 남성복 모델로서였다.어려서부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온 그는 80년대 초반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것같다. 함께 촬영했던 방송국 후배 탤런트에게 참으로 당당하게, 참으로 스스럼없이 ‘차비 5,000원’을 꿔갔다.


그는 연극, TV 출연, 의상 모델을 하면서 끊임없이 여러 장르의 공부를 했다. 그 중 한가지가 한국 무용이다. 이 역시 당당했다.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향학열에 불타는 재주 있는 제자를 무시하는 스승도 있을까.

작년 9월 난타가 뉴 빅토리극장의 2003~2004년 시즌 전체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뉴욕에 온 송승환은 그에게 한국춤을 가르쳤던, 현재 뉴욕에 사는 살풀이춤 대가 K씨에게 선생님, 밀린 수강료 드릴께요하고 말했다.

송승환은 1980년대 중반 뉴욕한국일보 방송국에서 일하며 브로드웨이를 사전답사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가 다시 뮤지컬에 몸담고 1990년대 초 비언어극이 세계 공연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할 무렵 난타를 창작해 내었다. 97년 초연 후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 해외공연 프로모터인 브르드웨이 아시아와 정식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1999년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를 비롯 3년간 시험무대를 거쳐 급기야 전세계 예술인들의 꿈인 브로드웨이에 전용공연장을 마련, 송승환은 오랜 꿈을 실현했다.

또 한사람 강익중.
1994년 커네티컷 위트니 뮤지엄에서 백남준과 공동전시를 하는 그를 처음 만나 한국과 뉴욕에 강익중이란 화가를 소개했다. 일하랴 공부하랴 바쁜 틈틈이 작품활동을 한 곳은 청과상에 일하러 가는 전철 안이었다.

작업시 손안에 간편하게 들어오는 캔버스 크기가 가로 세로 3인치, 그래서 그는 3인치 화가로도 불린다. 그즈음의 그는 차이나타운의 한 제과점에서 말했었다. 지금 내 통장 잔고가 100달러 정도 있는 것 같아요.그는 스스럼없이 현재 돈이 없고 작품이 팔릴 가능성이 없다면서도 새로운 작품을 말할 때는 눈에서 빛이 났다.

세계적인 화가로 이름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가난하다. 차이나타운에서 산 7달러짜리 시계를 차고 행상에서 산 10여달러짜리 운동화를 신고 맨하탄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며 작품 구상을 한다.


오는 4월에는 프린스턴 공립도서관에 벽화를 영구설치한다. 그의 발상은 언제나 엉뚱하다. 1999년 ‘십만의 꿈’이란 밀레니엄 아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북녁땅이 보이는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전세계 어린이들의 그림 10만 점을 설치하겠다는 포부를 말하는데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과연 될까? 허공 속의 꿈같은데 했었다.

그런데 1km비닐 하우스안에 전세계 어린이들의 꿈을 담은 설치작이 전시됐다. 이는 2001년 유엔본부 1층 로비의 ‘놀라운 세계전’으로 연결되고 다시 독일 베를린에서 ‘조국 통일’의 염원을 전세계에 보여주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꿈을 이뤄낸 이 두 사람에게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가난은 불편하기만 할 뿐 아니라 남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을 극복했다. 가난 자체에 구애받지 않고 대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을 투자했다. 그리고 10년후, 20년후, 30년후를 내다보며 남다른 꿈을 꾸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수중에 돈이 없으면 화가 나지 않던가? 기분이 저조하지 않던가? 오늘 먹고살기도 바쁜데 10년, 20년, 30년후는 너무 멀리 생각되지 않던가?자기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위인(偉人)과 범인(凡人)의 차이는 이렇게 나는 것이다.


민병임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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