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불체자를 위한 변명

2004-01-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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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대통령이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 한시적인 합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침을 발표한 후 9.11 이후 묻혀버렸던 불법체류자의 구제문제가 활발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체자 문제는 다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지난 11일 뉴욕타임스 일요판은 불법체류자가 사라진다면 미국은 어떻게 될까라는 내용으로 찬반의 입장을 다루었다.

불체자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만약 불체자가 없다면 맨하탄에서는 어린이들을 돌볼 보모를 구할 수 없을 것이며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호텔에서 타월을 세탁할 사람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 가게 종업원, 잔디 관리원, 식당 종업원, 심부름꾼, 잡역부 등 미국경제의 하부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기업은 물론 미국인의 가정과 개인생활에서 큰 불편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체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말은 그 반대이다. 불체자들이 없어도 경제적, 사회적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거의 없는 아이오와주에서도 호텔과 패스프푸드점의 허드렛일을 잘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불체자들 때문에 복지혜택 비용이 늘어나 납세자들의 부담을 크게 하고 재정적자가 불어나고 있다는 주장이다.

불체자란 그 나라에 살 수 있는 법적요건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법적 요건을 갖춘 사람 중 1순위는 국민 또는 시민이고 2순위는 영주 외국인이며, 그 다음이 상용, 관광, 유학 등을 목적으로 한 방문자이다.

그러나 비자 없이 밀입국을 했거나 합법적으로 입국했다고 해도 비자 기간이 끝난 후 계속 체류하면 불체자가 된다. 불체자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진국들의 당면문제이며 한국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이다.

미국에서는 레이건행정부 때 약 5년간의 논란끝에 1986년 불체자에 대한 사면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 후 불체자는 꾸준히 늘어 현재 미국에는 800만명에 이르는 불체자가 있다고 한다. 당시 불체자 사면 때 많은 한인 불체자들이 영주권을 취득하였으나 그 후 한인사회에도 불체자들이 많이 증가했고 특히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의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많은 사
람들이 무작정으로 도미, 불체자가 양산되어 있는 상태이다.

흔히 미국을 이민의 나라라고 한다. 건국 이전의 미국땅은 유럽에서 무작정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후 이민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이주가 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가적 통제와 심사를 받게 되었다.

미국의 이민정책은 몇 차례의 입법으로 큰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과 같은 체제가 잡혔다. 여러 차례 정책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민이 계속되어 온 것은 신규 이민이 풍부한 인력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여 미국의 경제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민정책의 틈새에서 불법체류자가 생겨나는 것은 이민법규가 완전무결하지 못하기 때문인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민법이 미국의 경제와 사회구조에 100% 부합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면 불법체류자가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와 사회가 원만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합법 신분자들 만으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마치 사람의 생활을 규제하는 도덕이 부족하여 법률을 만들지만 법으로도 안되는 부분이 있어 관행이라는 것이 존재하듯이 완벽한 이민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불체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불체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불체자가 없어도 미국의 하부구조가 잘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상층부에 있던 시민권자와 영주권자가 이른바 3D 업종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 받고 있는 보수를 받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높은 보수를 주게 된다면 지금처럼 사업이 수익을 올릴 수 있을까. 또 인건비의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을 소비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오와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불체자들이 없어도 생존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와 겨루어야 하는 미국의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불체자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한인업소들의 불체자 의존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의 불체자는 내일의 영주권자, 시민권자이다. 자격만 갖추면 불체자를 사면하여 미국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부시대통령이 이번 불체자를 한시적으로 합법화하기로 한 것은 진일보한 정책이다. 그러나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격을 갖춘 불체자에게 합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포괄적 불체자 구제 법안이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이기영(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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