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수첩 정리를 하면서

2004-01-08 (목)
크게 작게
어제 해나 오늘 해나 내일 해나 뜨고 지는 것은 변함없는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새해가 좋은 것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새해 첫날, 작년 한 해 동안의 영수증 정리를 시작했다. 세금보고도 해야하고 서랍 정리를 해야 마음이 정돈될 것 같았다.서랍 정리가 끝나자 옷장 안이 궁금하다. 옷장을 열어보니 몇 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안입는
옷, 웬지 손이 가지 않아 구박 당하는 옷도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정리할 것이 많다.

부엌이나 거실에도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살림살이가 부지기수이고 책꽂이에 가득 쌓인 책 중에는 너무 낡은 것, 시기가 지나 전혀 불필요한 자료 등 집안 구석구석 버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십 년 이상 한 집에 살다보니 짐 속에 치여 살 정도로 넘치는 세간 속에 용케도 숨을 쉬고
살아왔구나 싶다. 올해는 버리는 해로 삼아야겠다. 1, 2월 주말마다 버리는 작업에 들어가야겠다.


봄에 이사갈 계획도 있지만 일단 마음먹고 버리기 시작하여 단출한 공간이 되면 나란 존재가 눈에 뜨일 것이다.단순하게, 질박한 삶을 살자면 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새해에 영수증 정리와 더불어 수첩 정리도 시작했다.새 수첩에 올해 계획된 것을 기록하고 뒷장에는 전화번호와 주소를 옮기는 일이 시간이 꽤
걸리고 있다.가장 먼저 옮겨 적는 것은 엄마, 아버지의 제삿날, 이 부분에서는 잠시 멈칫거리는 것이 가슴 한쪽으로 싸아한 박하향이 머무는 것이다.그리고 한국과 뉴욕의 가족, 친지들, 친구와 이웃들, 병원과 집 앞 가게 및 세탁소, 식당, 콜택시 전화 번호 등등을 옮기면서 탈락되는 이름들이 있다.

절친한 친구라도 한국에 있으면 새해 수첩에서 1, 2년 있다가 빠져나간다. 같은 뉴욕 하늘 아래 살아도 1년 동안 한번도 안만났으면 또 빠져나간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래도 정이 멀어지듯이 한국에 있거나 오랫동안 연락이 뜸한 사람, 타주로 이사간 사람 전화번화도 리스트에서 빠지고 보니 주소록이 한결 간단해지며 새로운 인연을 맺는 사람들의 연락처
기입 공간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러다가 가슴 한쪽이 쿵 소리를 내는 것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은 사람의 전화번호와 주소이다.아무리 전화를 하고 편지를 띄워도 이미 그 사람은 그곳에 살지 않는다. 미 전국 어디든, 한국이든 아프리카든지 어느 하늘 아래에도 그는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새 수첩에서 전화번호가 빠지더라도 언제든 만날 수 있으며 설사 전화번호가 바뀌었더라도 수소문하면 만날 가능성이 있다.
돌아가신 분의 전화번호를 놓고 잠시 넋 놓고 앉아 있는다.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살아 계실 때 전화 한번이라도 더 할 걸. 어쩌다 안부전화를 하면 잊지 않고 전화 해주어 고맙다고 했는데, 한번이라도 더 내 목소리 들려드릴 걸.’차마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해 머뭇거리다 결국 번호를 옮기지 않는다.

수첩을 정리하다보니 주위에 연세가 80, 90 넘은 분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연세가 많으셔 전화를 해도 잘 못 알아들으시니 소리만 지르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97세 된 최할아버지는 건강하신가? 백수를 채우셔야 하는데. 필라의 딸네 집에서 요양 중인 90세 홍선생은 음식 투입구를 몸에 끼고 있으면서도 독립된 생활을 위해서 회복 중이라고 했는데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물건은 버려야 할 것만 눈에 뜨이는데 아무리 버리려해도 버리지 못할 것은, 진정 잊어버리려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인간의 정인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카드고 신년 연하장이고 받기만 하고 한 장도 보내지 못한 답장을 구정을 기해 모두 보내야 할 것 같다. 살아 있을 때 정을 나누어야지 죽고 나면 정을 주어도 받을 분이 없는 것이다.


민병임 편집국 부국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