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파라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

2004-01-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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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6년 미국에 온지 17년만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받은 첫번째 인상은 마중나온 친구들의 머리가 반백이 한참 지났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기억 속의 어머니 얼굴이 상상했던 것 보다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더 늙으시고 여위셔서 불효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었다.

서울에서의 시간을 보내면서 지하철 시설이 매우 잘 되어있는 것에 놀랐고, 모르는 건물들이 많이 세워진 것이 눈에 새로와 지리와 방향감각을 잃고 한동안 헤매기도 하였다.

95년부터 오늘까지 그간 10여차례 사업관계로 한국을 왕래했고, 특히 금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로는 여러가지 정치, 경제, 사회, 외교, 국방에 대한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가 진행될 수록 서로간에 골이 깊은 견해 차이가 있음에 놀라고 때로는 주제에 따라서 뜨겁게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몇 번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홀로 다짐하면서도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할 때면 으례히 안주감으로 따라 나오는 이야기는 정녕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고작 몇 년 사귀던 친구가 아니요, 소위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교, 또는 사회에 나와서까지도 함께 어울려 다니던 소위 죽마고우들이 아닌가! 특히 주한미군 문제를 예로 들자면 미군은 철수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서슴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로 아연해져서 내가 지금 간첩(?)에게 포섭된 자와 얘기를 하고 있는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이삼십대라면 그런대로 사고와 감정처리의 미숙, 그리고 인생경험의 부족 등으로 치부해 줄 수도 있으련만, 이들은 나와 같이 비록 어렸었지만 8.15, 6.25를 겪은 세대가 아닌가! 어쩌자고 어줍잖은 자존심만 세우려다 그나마 초가삼간 마저 태우려 하는 것일까? 얼굴 붉히며 결끼가 섞인 말들이 오고 간 후에 나는 마침내 참았던 별리적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1)한국사람들은 배가 고픈 것은 잘 참아도 배가 아픈 것은 결코 참지 못하는 국민이다 (2)나는 똥파리이고 너희는 구더기들이다 라고.

우리는 본래 한국 농촌 재래식 뒷간의 구더기 같이, 어렸을 때부터 젊은 날들을 함께 한 군데서 꼬무락거리며 매일 매일 등을 부비고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17년이란 세월을 미국생활과 문화 속에 살게 되었지만 결코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본국에서 올림픽을 하거나, 풍수해가 나거나, 데모가 나고, 연평도 사건이 터지고, 북한 핵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예의 주시했으며, 항상 관심을 쏟아왔고 모든 것이 평화적으로 전쟁 없이 해결되기만을 진정 바라왔다.

그러나 이제 국가와 민족의 생과 사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앞에 놓고 이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방법이 이토록 차이가 날 줄이야. 결국 적지않은 세월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서양문화권의 영향으로 다소 개방된 시야와 좀 더 폭넓은 사고를 갖게 되지 않았나, 스스로 자부하는 마음도 드는데 이에 반해 비록 교양과 상식이 풍부하고 TV, 신문 등을 통해 외국 문물을 많이 접해 본 친구들이라 하여도 여전히 지역적으로 제한되고, 단일민족으로 체질화 된 좁은 땅덩어리의 숙명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소위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나 싶고, 또한 모든 주장은 결국 내 배를 째라는 막가파식으로 미리 쳐놓은 배수진과 ‘너는 너’ ‘나는 나’ 식의 극단적 상대주의로 귀착하여 양보할 줄도, 남의 의견을 들어주려는 대화의 기본적인 아량도 없어 보였다.

17년이란 세월에도 친구간에 이토록 현격한 의견의 차이가 있건만 금년으로 휴전한지 반세기가 지나고 있는 이 때에 북한을 막연하게 우리 형제요, 자매요 하며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소원인 통일이 마치 몇년 내에 이루어질 것 같이 성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철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김영일(무역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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