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파원코너] 사색당파

2003-12-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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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정조는 불운한 임금이었다. 정조가 즉위할 때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섰던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할머니(대비)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했다.

주변이 정적들로 가득찬 가운데 24세의 어린 임금은 노론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다.

조선조 초기는 쿠데타와 혁명으로 날을 지샜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열었고, 그의 아들 이방원은 두차례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으며, 수양대군은 힘을 배경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됐다.


그 와중에 권력을 잡은 사대부는 벼슬과 부를 장악했고, 여기에
서 밀려난 선비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나중에 당파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배경이 여기에서 나온다.

조선초기 70년 동안 권력에서 밀려나 야당 생활을 하던 사림파는 지방 조직을 배경으로 9대 성종때부터 중앙에 진출, 서서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몰아낼 땐 단결했지만, 일단 권력을 장악하자 곧바로 분파를 형성했다.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져 조선조 후반기는 이른바 사색당파(四色黨派) 싸움으로 날을 지샜다. 조선조 당쟁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서인은 기호지방, 동인과 그 갈래인 남인은 영남 유생을 기반으로 했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내걸고, 그들은 결국 지역주의 패싸움을 했던 것이다.

야당이 된 당파는 자신을 지지하는 임금을 세우려 했고, 집권 정파는 새로운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흔들기 일쑤였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소론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막강 파워였던 노론에 밀려 동생인 영조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했고, 영조를 등에 업은 노론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부쳤던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노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10년 이상 은인자중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소론은 노론의 탄압으로 지리멸렬했고, 남인은 본거지인 영남지역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정조 12년 마침내 남인들이 집단 으로 궐기했다.

남인들은 영남 유생 1만여명이 연명한 상소문을 들고 대궐 앞에 몇 달째 꿇어 시위를 벌였다.

정조는 노론을 타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상소 내용은 사도
세자의 복권과 그의 죽음에 대한 인책론이었다.

정조는 경상도 젊은이들의 시위를 이용해 경기도 사대부(노론) 세력을 실각시키고, 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조 후반 300년은 당쟁의 역사였다. 크게 4개 당으로 나눠져 싸웠지만, 각 당 내에도 여러 계파가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웠다. 정권을 쥔 정당은 상대당파의 씨를 말리기 위해 수차례 사화(士禍)를 일으켰고, 선비들은 백성이 굶든 말든 상관없이 권력에 아부하며 뇌물을 돌려 출세길을 찾는데 혈안이었다.

조선조가 당쟁으로 인해 망했다는 일본의 식민사관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대부 계급이 당파싸움에 매몰돼 있는 동안에 자본주의가 확산되며 구체제가 몰락하는 국제정세에 눈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유일하게 잘 한 일로 지역주의 극복을 들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지역주의 망령이 다시 나타났다.

노태우 정권때 호남을 포위하기 위해 삼당 합당을 하더니,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정당은 지역당으로서의 위치를 강화했다.

그 사이에 자민련이 한나라당에서 갈라지고, 열린 우리당이 민주당에서 분당하면서 한국 정당은 4당 체제가 됐지만, 뿌리는 지역에 있다.

중국 송나라때 학자 구양수는 저서 ‘붕당론’에서 공도(公道)를 실천하는 모임을 군자당(君子黨), 개인 이익을 도모하는 정당을 소인당(小人黨)이라고 정의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한국 정치판을 소인배들의 당파 싸움으로 날을 지샜던 조선시대에 비교할 때 그다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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