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상실 그린 12세난 소년의 안쓰러운 성장기’
2026-04-24 (금) 12:00:00
박흥진 편집위원
▶ 박흥진의 영화이야기 - 새 영화 ‘암룸’(Amrum) ★★★★½ (5개 만점)
▶ 아이의 눈으로 본 사상이 다른 어른의 삶
▶ 주입된 사상에 혼란 빠진 정체성·소속감
▶ 정치적 색채가 짙은 진지하고 심각한 작품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북해 상에 있는 독일의 섬 암룸에 사는 12세난 소년의 안쓰러운 성장기이자 순수의 상실을 그린 독일영화로 튀르키예계 독일 감독 화티 아킨의 주도면밀하고 착 가라앉은 연출 솜씨가 느껴진다. 영화는 독일의 노장 감독 하크 봄의 경험을 바탕으로 봄과 아킨이 함께 각본을 썼다.
아이의 눈으로 본 사상이 다른 어른들의 삶과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어른들에 의해 주입된 사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아이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다루고 있는 다분히 정치적 색채가 짙은 진지하고 심각한 작품이다.
함부르크에 살다가 부모의 고향인 황량하게 아름다운 섬 암룸으로 피난 온 소년 나닝(야스퍼 빌러벡)은 만삭인 어머니 힐레(라우라 통케)와 이모와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살면서 어머니를 돕기 위해 나치 반대자인 테사(다이앤 크루거)의 감자밭에서 일해 먹을 것을 구해온다. 힐레와 나닝의 아버지는 열렬한 나치지지자들로 아버지는 나치 고위 간부로 본토에 있다. 힐레는 나닝이 밖에서 듣고 들어온 “전쟁이 다 끝나간다”는 말을 하자 그런 반역자의 발언을 한 장본인을 당국에 고발하라고 화를 낸다.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뉴스 방송을 들은 힐레는 이에 충격을 받아 아기를 출산하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나닝에게 흰 빵과 버터와 꿀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닝은 전시 희귀품인 이것들을 구하려고 집을 나서 이 집 저 집을 찾아가 통사정을 한다. 전쟁에서 오름 팔을 잃은 빵가게 주인에게 “하일 히틀러”를 복창하고 흰 빵을 달라고 요청하나 밀가루가 없다는 말만 듣는다. 이어 동네 의사를 찾아가 약용으로 쓰는 밀가루를 조금 얻어내고 양봉업자를 찾아가 꿀을 달라고 부탁하나 꿀이 없다.
나닝은 이어 열렬한 나치 추종자인 삼촌 오노를 찾아가 버터를 달라고 요청하는데 오노는 히틀러 청소년 단원인 나닝에게 히틀러 청소년단의 선서를 외우게 하고나서야 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닝은 자기 부모가 친척에게 저지른 만행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 나닝이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나치즘에 대한 각성과 부모가 지닌 사상을 유물처럼 물려받은 아이의 정신적 혼란이 빌러벡의 민감한 연기에 의해 절실하게 표현된다.
나닝의 흰 빵과 꿀과 버터 구하기 강행군 속에 나닝과 그의 친구 헤르만의 관계가 아름답게 묘사된다. 나닝이 헤르만에게 빌려준 허만 멜빌의 ‘모비 딕’을 히틀러의 나치즘과 비유한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헤르만은 나닝에게 자기 할아버지가 에이하브 선장은 히틀러요 포경선 페코드는 독일이며 모비 딕은 신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어린 아이가 자아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방황과 함께 자신들이 믿고 있던 사상의 괴멸에 충격을 받아 고뇌하는 어른들의 후유증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런 묵중한 주제를 가진 영화이지만 아킨 감독은 히틀러의 연설식이 아니라 차분하고 부드럽고 자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빌러벡의 뛰어난 연기에 의해 더욱 어필해오는데 매우 성숙된 섬세한 연기다. 또 하나 아름다운 것은 촬영.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원시적 아름다움으로 잡아낸 암룸의 자연미가 눈부시다. Royal극장(11523 Santa Monica)에서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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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