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치에서 가장 음산한 발상 중 하나가 캘리포니아 배심원단의 지지를 받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는 개인의 자율성을 민주주의의 근본으로 보는 신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개념은 개인이, 흔히 말하듯,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전제를 부정한다. 개인은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형성하고 수정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약화될 때 정부는 대중의 의식을 관리하려는 야망을 확대하게 된다.
중국 소유의 틱톡을 “국가 안보”를 이유로 금지했을 때 연방 의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연방 의회가 특정 플랫폼을 겨냥해 규제한 첫 사례였는데, 의회 소위원회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서사”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될 수 있는 잠재적 피해를 근거로 한 조치였다.
캘리포니아 배심원단은 6세 때 유튜브를, 그리고 9세에 인스타그램을 사용하기 시작한 현재 20세 여성의 주장을 심리했다. 그녀는 자신의 다양한 정서적·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불안정한 가정환경이 아니라 해당 플랫폼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분석가 중 한 명은 그녀가 가정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배심원단은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혼란스럽게도 메타와 구글이 알고리즘과 기타 장치를 설계함에 있어 “중독성”을 유발하도록 의도했으며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와 논평은 순진한 찬사의 언어 일색이었다. 배심원단이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설계된 “중독”에 대해 “책임을 지게 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소셜미디어 “생존자”들은 플랫폼 알고리즘에 의해 “중독된(hooked) 상태”에서 살아남았다고 묘사됐다. (이 표현은 종종 헤로인과 관련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들 플랫폼은 담배처럼 명확한 중독 물질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용자의 과거 행동에 따라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꼭두각시 조종자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소셜미디어 피해자 법률센터는 아마도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수익성을 더 쫓아서 쓰나미처럼 소송들을 쏟아낼 것이다.
요즘 일부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취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마이크로 어그레션(미세한 공격)”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촉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안전한 공간”을 요구한다. 언어의 과장이 어떻게 ‘피해자’라는 바람직한 지위를 얻는 통로가 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유익한 기술과 인기 있는 사회적 현상들은 일부 사용자들에 의해 오용된다.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운전하고, 과도하게 술을 마시며, 무모하게 도박을 한다. 패스트푸드 체인 역시 여러 의미에서 “과도한 이용자”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서 강력한 쾌락을 느끼며, 그로 인해 뇌의 화학 작용이 위험한 반복 행동에 대한 거의 저항할 수 없는 욕구를 유발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를 “중독”이라는 의학적 용어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치·철학적 입장에 과학적 외관을 덧씌우는 것이다.
원고 측 변호사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일부 식당에서 제공하는 무료 토티야 칩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식사 중 잠깐의 “중독”을 만든다는 것인가? 원고는 자신의 청소년기 우울감, 신체 이미지 왜곡, 그리고 기업 제품을 과도하게 소비한 결과로 나타난 여러 문제들을 대기업 탓으로 돌렸다. 이러한 책임 전가는 위험한 발상에서 비롯된다. 즉, 개인의 자율성은 매우 약하고 희미하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개인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유아화된 전제는 결국 가부장주의로, 나아가 국내적 권위주의로 이어진다.
만약 인간이 자신이 속한 문화의 자극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부드러운 밀랍과 같은 존재라면,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포괄적인 정치 프로젝트가 된다. 정부는 자신이 정의하는 ‘건전함’을 기준으로 말해지는 것, 읽히는 것, 들리는 것, 생각되는 것, 가르쳐지는 것의 모든 것을 보장해야 한다.
몇 년 전 연방 상원 소위원회는 미성년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거하도록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강제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그러나 ‘해로움’이라는 개념은 점점 더 탄력적이고 확장되는 개념이 되었다. 이제는 청소년에게 “불안을 유발하는” 콘텐츠도 해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청소년의 불안을 줄이는 일만으로도 정부는 끊임없이 바쁘게 될 것이다.
어린이의 취약성을 과장하는 일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950년대에는 이것이 당시 매주 수천만 부가 판매됐던 10센트짜리 만화책에 대한 도덕적 공황을 낳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인과관계는 엄밀하게 입증되지 않은 채 쉽게 단정됐다. 1954년 출간된 400페이지 분량의 베스트셀러 ‘순진한 사람들에 대한 유혹: 만화책들이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만화가 청소년 비행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반 만화 운동을 촉발했다. 배트맨과 로빈은 동성애적 경향의 상징으로 해석됐고, 수퍼맨의 절차를 무시한 범죄 대응은 ‘은밀한 파시즘’으로 비판받았다. ‘아치’ 만화의 베티와 베로니카는 곧 더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도록 그려졌다.
캘리포니아 배심원단이 소셜미디어 판결을 내린 지 며칠 뒤 신시민자유연합은 바이든 행정부 당시 코로나19 팬데믹 관련 “허위 정보”라고 규정한 발언을 억제하려 했던 사건과 관련해 합의에 도달했다. 이들 발언 중 상당수는 사실이었으며, 모두 헌법의 보호를 받는 표현이었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정부가 사회 통제를 목적으로 인터넷을 관리하려는 의지를 유지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중독”과 같은 비난과 가설적 “해로움”을 내세워 정부는 캘리포니아 배심원단의 판결을 발판으로 삼아 이를 더욱 확대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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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F. 윌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