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2년전쯤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동네에 있는 태권도인들과 민경호 버클리대 명예교수. 왼쪽부터, 우성현관장, 박경식관장, 최의정관장, 민경호 명예교수, 안창섭교수, 한지환관장.<사진 최의정 관장>
■최의정 관장의 민경호 UC버클리 명예교수의 삶*태권도의 세계화
연재 목차
1. 한국전쟁과 어린 시절
2. 미국 유학과 버클리 대학에 체육 교수 채용
3. 태권도 세계화의 불씨
4. 미국의 대학에서 세계로
5. 태권도의 올림픽 입성을 위한 민교수의 노력
6. 버클리 대학의 태권도 교육이 영구 보존되다.
7. 민경호의 유산
이글을 쓰면서
한 2년전쯤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동네에 있는 몇몇 태권도인들이 민경호 버클리대 명예교수와 점심식사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 점심 시간에는 주로 당신이 해오셨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듣게 된다. 매번 귀중한 자료들을 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주시기도 한다. 댁에서 심으신 포도와 배를 나누어 주시는 것도 연중행사 중 하나이다. 이렇게 민교수와의 만남이 반복되면서 더 깊어지게 되는 생각은 ‘코리안 카라테’로 미국에 발을 디딘 태권도가 세계화를 통해서 올림픽 스포츠로 성장하도록 주도한 사람이 바로 우리 동네에 살고 계신 민교수라는 것과 이 세계화의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 그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대와는 많이 달리 그의 업적이 저평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91세의 연세에 왼쪽 뒤 범퍼가 찌그러진 토요타 캠리를 몰고 미팅에 나오시는 민교수를 보면 그의 열정과 겸허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동안 민교수의 업적에 대한 단편적인 글들이 있었지만 ‘회고록’ 형식의 글은 이 글이 처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만남이 깊어지면서 나는 이 글을 쓰기로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온 태권도인 ‘론 드쥐엔카(Ron Dziwenka)’박사를 설득하여 이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는 연세대 태권도부와 자매결연을 맺은 캐나다의 알버타 대학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아예 짐을 싸 들고 한국에 와서 한국에 12년동안 머물렀다. 연세대의 김영선 교수와 함께 연세 외국인 태권도회를 만들어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연세대에서 지눌의 돈오와 태권도라는 주제로 석사학위도 했다. 태권도의 정신세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고려시대말 인도에서 한국으로 오신 지공스님 연구로 아리조나 대학에서 불교철학 박사를 받았다.
그동안 태권도 학과의 지속적인 팽창으로 태권도 역사에 대해 많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서로 상충되는 이론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글의 특징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민경호 개인의 삶을 통해 실현된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내가 민경호 교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7월부터 시작된다. 버클리 공대에 다니면서 태권도 수업을 듣고 있던 내 아내의 사촌, ‘닉’이 민교수를 소개해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서면서였다. 마침 버클리 대학 무도 프로그램주최로 가을 학기 수련생을 모집하는 무도 시범 대회가 있어서 ‘닉’과 함께 버클리에 갔다. 가벼운 마음으로 탱크 탑에 반바지를 입고 시범을 구경을 하러 갔다. 시범관람후 ‘닉’이 떼를 써서 민교수의 방으로 인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는 당황스러워했다. 이렇게 조금은 서로 놀라면서 만났던 우리의 만남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 되었다. 그 후 나는 베이지역에 태권도장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버클리 대학 태권도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는 민교수를 도와서 두가지 의미 있는 일을 하였고 이를 통해서 그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게 되었다. 첫번째는 2002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열린 국제 대학 스포츠 연맹 (FISU) 태권도 대회에서 귀빈 의전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2006 년에 서부지역의 무도인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 시상식을 개최하였다. 자주 전화를 주셔서 전반적인 행사 진행과 세세한 점까지도 지적을 해 주셨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삶은 성공을 위한 기적의 연속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획기적인 사건들이 세 개 있었던 것 같다고 정리를 한다. 첫번째는 미국의 명문대학인 버클리 대학에 무도 사범으로 직장을 잡게 된 것이다. 아직도 사모님과 함께 앉아 말씀을 나눌 때면, 이 사건이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며, 그 이후로 이루어질 모든 일들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단다. 두번째는 카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나 태권도가 독립된 단체로 미국 체육 협회에서 인정을 받게 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태권도는 그후 가이스프 (GAISF: Global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 팬암 스포츠 조직 (PANAM Sports Organization)등에 가입하게 되고 세계화로의 틀을 다져 올림픽에 들어가게 된다. 세번째는 캘리포니아 주의 교육 예산이 깎이게 됨에 따라서 버클리 대학의 태권도 교육 프로그램이 그가 은퇴를 하게 된 후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시작한 석좌교수 제도의 도입이었다. 오랜 노력 끝에 한국정부로부터 1995년에 4년에 걸쳐서 백만불의 기금을 받게 된다. 따라서 민교수의 후계자로 지정된 안창섭 교수는 버클리 대학 파운데이션을 통해서 월급을 받게 되었으며 버클리에서 태권도 교육은 지속이 될 수 있었다.
한국 전쟁을 피하여 황해도 온천면에서 인천으로 내려온 소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클리 대학에서 체육교수로 채용되어 태권도의 세계화의 주역이 된 것은 그냥 운이 좋아서였을까?
한국 전쟁과 어린 시절***피난부터 유도대학까지
그는 1935년 8월 14일에 황해도 개성에서 멀지 않은 신천군 온천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민은기 옹은 대지주였으며 5남 2녀중 장남이었다. 장남이었던 민은기 옹은 아버지(민교수의 할아버지, 민병학 옹)의 권유로 일본대학에서 유학을 하게 된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돌아왔으나 부친의 권유로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민교수의 어머니 윤제영은 재령 사람이다. 재령은 쌀농사로 유명한 동네이다. 민교수는 3남 1녀중 3남이고 여동생은 막내였다. 큰형, 경문, 작은 형 경성, 그리고 여동생 경국이 그의 형제자매이다. 민경호는 7-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된다. 그 후로는 큰 형수의 보살핌속에서 자라게 된다.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씨름을 좋아했으며, 중학교때부터는 유도를 배우게 된다. 태권도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1.4. 후퇴를 기점으로 그는 대지주인 아버지의 권유로 김일성의 군대 동원령을 피해서 형수와 동생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폭격으로 피란을 가는 길이 위험함을 깨닫고 동생을 아버님께 돌아가도록 한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은 한국군과 미국군이 주군하고 있던 연평도였다. 이곳에는 미군 산하에 8240부대라는 특수부대가 있었다. 신천중학교 수학 선생이었던 차선생을 만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군대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그는 거기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형수는 큰 형을 찾아서 인천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 그는 6-7개월을 차 선생과 함께 보낸다. 이 부대의 임무는 북한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맨손 무술에 관심을 더 갖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학 선생의 조언대로 유엔 경찰국 (UN Police Force)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형을 찾아서 인천으로 가게 된다.
형을 만나서 인천에 정착하게 된 후에는 실향민들이 만든 황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공백 때문에 그는 같은 반 학생들보다 2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반장으로 활동하면서도 씨름을 잘해 씨름대회에서 쌀가마를 상으로 타기도 했다. 그는 형과 함께 전국 체육 대회에 유도 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의 형은 경찰팀의 선수로, 그는 고등학교 선수로 참가하여 경기도가 우승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 시절에는 미국 영화인 “All Brothers Were Brave.”라는 영화가 유행이었는데 신문에서 이를 본 따서 “형제는 용감했다.”라는 기사를 써서 그들은 인천의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무도 뿐만 아니라 축구, 투포환, 투원반, 투창 등의 다른 스포츠에도 능통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하면서 유도를 배웠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 부터 유도를 배웠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유도에 집중하게 되었다. 당수도로 알려졌던 태권도도 고등학교 시절에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기도 경찰 무도관의 김상태 선생이 유도 대학 (현 용인대학)에 다니면서 경기도 경찰국 소속 경찰 선수로 일 년에 한 번씩 시합을 뛴다면 장학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여서 유도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