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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로버트 레드퍼드 덕분입니다

2025-09-25 (목) 12:00:00 이영창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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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될 마음을 먹었던 건 앨런 퍼쿨라 감독의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을 보고 나서였다. 현직 대통령이 연루된 음모를 집요하게 파헤친 민완기자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는 그 어떤 할리우드 영화 주인공보다 가슴을 고동치게 만든 ‘현실 영웅’이었다. 닮고 싶었던 우드워드 같은 언론인이 결국 되진 못했으나, 어쨌든 그 영화가 삶의 경로를 바꾼 계기였던 것은 맞다.

■ 박찬호의 미국행 전부터 메이저리그 팬이 된 시작점은 배리 레빈슨 감독의 ‘내츄럴’(1984)이다. 경기장 조명을 불꽃처럼 터뜨린 끝내기 홈런은 스포츠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가장 좋아하는 현대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를 처음 안 것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1974)를 본 후였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의 ‘초원에서 머리 감겨 주기’ 장면에서 메릴 스트립의 매력에 처음 빠졌고, ‘흐르는 강물처럼’(1992)을 보고 미국 여행 계획에 굳이 몬태나주를 넣었다.

■ 이 모든 영화에서 주연 또는 감독으로 활약했던 로버트 레드퍼드가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 혹은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 않은 문화 향유 기준을 형성하는 과정엔 우연히도 그의 영화들이 있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레드퍼드 영화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추억’(1973)에서 그는 숨 막히는 미모의 금발 청년이었고, ‘은밀한 유혹’(1993)이나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에선 거부할 수 없는 중년의 매력을 발산했다.

■ 젊은 배우의 요절 소식은 폐부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찌르지만, 오래 봐 온 원로 배우의 죽음은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식힌다. 도널드 서덜랜드, 알랭 들롱, 진 해크먼, 그리고 레드퍼드.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김없이 흐르고, 우리도 언제일지 모를 저 끝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소중한 계기와 멋진 추억을 선사했던 명배우의 명복을 빈다.

<이영창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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