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애가 세 살도 되기 전, 동화 ‘청개구리’를 읽어줄 때였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주시하던 애가 “엄마의 무덤이 떠내려간다.”는 대목에서 책을 확 덮으며 우는 거였다.
아이의 돌발적인 반응에 어리둥절해서 “왜 그래?”하고 책장을 다시 펼치는데, 질색하며 책을 탁 치워버린다. ‘내가 너무 감정을 잡고 읽어줬나? 허나 제 누나는 어릴 때 똑같은 식으로 읽어줬어도 “그래서?”했었는데.’ 아들애가 감성적이고 감정이입이 유난해선가? 지금까지 의문이다.
그 후로도 “청개구리 읽을까?”하면 자지러지듯 극구 말린다. 애가 괜히 떼쓰고 고집 피울 때마다 야단치는 대신 “청...”하면 얼른 꼬리를 내리곤 했었다. 청개구리란 단어가 애한텐 ‘겁주기용’으로 단연 최고였다. 결국 다른 그림책과 달리 청개구리만은 끝내 다 못 읽어준 채, 좀 크면 재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랬는데 애가 3살 8개월 때 호주 Perth로 데리고 나왔다가, 3년 후 뉴욕으로 이주, 영어권에서 내리 살게 됐다. 딸애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와서 2년 동안 한글로 일기쓰기를 시켜 한글을 까먹지 않게 했다.
아들애는 교회의 토요 한글 반을 다녀서 한글을 깨우쳤다. 비록 발음대로 쓰고 받침도 틀리지만 읽고 쓰긴 한다. 아빠 엄마랑은 한국말만 쓰고 자랐지만 저희들끼린 영어사용이 우선이긴 했다.
아들애가 대학을 가더니 한국어 반을 수강했다. 영한사전도 보고 제법 질문도 많기에, 어릴 적 청개구리 얘길 해주면서 읽어보라고 책을 줬다. 좀 읽어보더니 글자는 읽겠는데 단어의 뜻과 내용을 도통 모르겠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가 쓴 글을 못 읽어 참 속상해”한다. 허긴 쉬운 동화책의 문장도 이해가 안 간다니, 엄마 글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겠다.
그랬던 아들애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다. 일주일에 이삼일씩 손자를 돌볼 때면, 첫 언어로 입력시키려고 한국말로 자장가를 불러주고, 그림책의 사물들 이름도 한국말로 가르쳤다. 손자가 처음 발성한 단어도 내가 늘 화초 앞에서 가르쳐주던 “꼬오(꽃)”였다. 그렇게 한국말을 익혔어도 조기유치원에 다니더니 슬그머니 영어로 대체됐다.
커가면서 간단한 한국말은 알아들어도 말하기는 더 어려운지, 한국말로 하라면 쑥스러워 기어들어가는 소리다.
어느덧 손자가 중학생이 되고 학년이 끝나자, 며느리가 카톡으로 성적표를 보내줬다. 그런데 한국어과목이 있고 그것도 A+를 받았다.
놀라서 한국어를 배우냐니까 외국어로 선택했단다. 애들 땐 선택어에 한국어가 없어 둘 다 Spanish를 택했었다. 손자도 그러려니 했던 참에 너무 뿌듯하다. 그만큼 한국의 국위가 격상됐고, 문화적인 파워와 영향력이 강세인 문화강국으로 변모한 증거니까.
애들도 예전보다 모국에의 자긍심이 커졌는지, 손자의 여름캠프도 꼭 한국 애들만 오는 곳으로 보낸다. 아무래도 학교와 달리 한국인이란 공동체의식과 모국 문화와 정서에 더 젖게 될 터! 한낱 철새도 앞에 표시 없이도 자신의 하늘 길을 기억 하듯, 애들도 강요 안 해도 자연스레 본능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더 인식하게 될 터!
아들애가 손자가 썼던 노트들을 줬다. 공책 뒤에 많이 남은 백지에다 글을 쓰란다. 제가 학생일 적에 학년말이면 딸과 아들의 노트여백에다 내가 글을 쓰곤 했던 걸 기억했나보다.
나는 초고서부터 탈고까지 손 글씨로 노트에 쓴 다음에 컴퓨터에 입력한다. 노트의 백지 남은걸 버리기도 아깝지만, 나름대로 애들도 소수계 학생의 애환이 왜 없었겠나 싶어 애틋해서다. 부모를 원망 않고 묵묵히 학업수행에 정진했던 점이 고맙고, 나도 분발하자 해서다.
요새는 글 쓰다 막히면, 제 아빠랑 글씨체가 비슷한 손자가 공부한 걸 읽어보며 미소 짓곤 한다. 모쪼록 한글을 잘 배워 능숙한 독해력으로 제 아빠가 미완성으로 끝낸 청개구리를 읽으면 좋겠다.
우수한 한국문학 작품들을 번역판이 아닌 한글로 소화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미숙한 할머니의 글도 읽을 수 있게 됐으면 하는 소망이지만, 참으로 요원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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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