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AP 한국어 도입 추진위 출범에 거는 기대

2025-08-26 (화) 12:00:00 노세희 부국장대우ㆍ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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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미국 대학입학시험의 한 영역이던 SAT2 한국어 과목이 채택됐을 때 많은 한인들은 반신반의했다. 과연 소수 언어인 한국어가 미국 교육 제도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 한인 단체들의 결집과 삼성의 후원이 맞물리면서, 1997년 정식 시험 과목으로 채택된 SAT2 한국어는 빠르게 정착했다.

그 여파로 미 전역의 초·중·고교에 한국어반 개설이 확산됐다. 채택 당시 불과 네 곳에 불과했던 한국어반 개설 학교는 이후 급속히 늘어나 2023년 말에는 전국 초·중·고교 217곳에서 2만5,00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더욱이 미국 대학에서는 외국어 학습 인구가 전반적으로 줄고 있는 가운데, 한국어는 오히려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현대언어협회(ML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어 외 언어를 공부하는 학생 수는 2016년 141만8,584명에서 2021년 118만2,562명으로 16.6% 감소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한국어 수강생은 2016년 대비 38.3% 늘어난 1만9,270명에 달했다.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보고한 대학도 2015년 LA 타임스 추산 154개에서 29개 증가했다. 한국어는 현재 미국 대학에서 가장 많이 수강하는 외국어 15개 가운데 라틴어 다음으로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지난 21일 출범한 ‘AP 한국어 도입 추진위원회’는 SAT2 한국어 도입 당시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미주 한인사회는 이미 2010년부터 한국어를 대학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AP 과목으로 채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칼리지보드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험난한 과제가 놓여 있지만, 이미 절반 이상의 조건은 충족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교사 양성, 교육 표준화, 재정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3~5년 안에 현실화도 가능할 것이다.

시기도 무르익었다. 2021년 SAT2가 사라진 지 4년이 지났지만 한국어 학습 수요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비 한인 학생들의 참여가 늘고 있으며, K-팝과 드라마로 대표되는 K-컬처가 언어 확산을 강력히 견인하고 있다. 언어가 문화와 결합해 전파될 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우리는 직접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관건은 추진 방식이다. 중국어 AP 과목의 경우 중국 정부가 전면적으로 나서 지원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오히려 반감이나 견제를 불러오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추진위원회는 한인사회가 주도하고, 한국 정부는 조용히 재정·제도적 지원을 하는 ‘역할 분담’ 방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이번 위원회가 교육계, 지역사회, 동포 단체를 망라한 민간 중심 협력 구조를 만들어낸 점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만약 AP 한국어가 정식 과목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그 파급 효과는 SAT2 한국어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단순히 언어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나는 차원을 넘어, 미국 내 한국어의 위상 강화, 한인 2·3세의 정체성 유지, 나아가 한국의 국가 이미지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 SAT2 한국어가 한국어 교육 확산의 불씨였다면, AP 한국어는 그 불씨를 본격적인 불꽃으로 키우는 제도적 도약이 될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인사회의 꾸준한 결집과 한국 정부의 조용하면서도 든든한 뒷받침이다. LA 한국교육원을 비롯한 미국 내 8개 교육원이 힘을 보태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온다. 30년 전의 작은 성공이 오늘의 큰 전환점으로 이어졌듯, 이번에도 그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기를 기대한다.

<노세희 부국장대우ㆍ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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