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송나라는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업적을 남긴 사회였다. 세계 최초로 발행한 화폐를 기반으로 시장 경제를 중시하는 정부 정책에 따라 물자는 풍부해지고 기술 혁신은 거듭됐다. 화약, 인쇄, 나침반 등이 이 때 만들어졌고 벼를 비롯한 농작물의 품종 개량 등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운하를 비롯 수로 사업이 발전해 먼 곳의 물자를 싸게 운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0세기 송나라 건국 초기 5천만 명 선이던 인구는 200년만에 2배로 늘었으며 이와 함께 12세기 당시 송나라의 GDP는 유럽의 3배에 달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산하고 있다.
사는 것이 여유가 있어지면서 문화도 꽃피웠다. 중국 최대 문인의 하나로 꼽히는 소동파와 구양수, 중국 최대 철학자로 불리는 주희가 모두 이 때 사람이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사람을 뽑는 과거제가 확립되면서 정부는 어느 때보다 유능한 인물로 채워졌다.
이 정도면 감히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것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 등 북방의 유목민족들과 싸우기만 하면 졌다. 이들은 송나라와는 달리 경제력도 문화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사냥에 필요한 말과 칼, 화살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같은 기본적인 재료에다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싸우고자 하는 의지다. 이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 12세기 중반 몽골에 나타났다. 추장 예스게이의 아들 테무진이 그 사람이다.
테무진은 8살 때 아버지가 적들에게 독살당하는 바람에 가족 전체가 부족 사회에서 쫓겨나 황야에서 사냥을 해 먹고 살았다. 그는 태어나서 한권의 책을 읽은 적도 없고 누구에게서 병법을 지도받은 적도 없다고 전해진다. 그가 배운 것은 모두 들판과 거리에서 몸소 싸우며 스스로 익힌 것이다. 그가 이룬 업적은 어느 쪽이 진짜 스승인지 보여준다.
징기스칸 리더십은 충성하는 자에게는 화끈하게 베풀고 저항하는 자는 멸족키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한 때 맞섰더라도 항복하면 후하게 대접했지만 끝까지 대드는 곳 주민은 씨를 말렸다.
몽골군의 특징은 뛰어난 정보력과 통신망, 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과 순발력, 적응력, 그리고 무엇보다 기동력이다. 거의 대부분이 기마부대인 몽골군은 병참 없이 현지에서 약탈을 통해 물자를 충당했다. 처음에는 화기도 수군도 없었지만 송나라의 기술자를 포로로 잡거나 회유해 나중에는 누구보다 강한 화력과 수군을 갖게 됐다.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몽골은 송나라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송나라는 인구 1억에 100만명의 군대를 갖고 있었고 몽골은 인구 80만에 상비군 10만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군대가 많아도 싸울 의지가 없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북방에서 침략군이 몰려 올 때마다 송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대신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춥고 험한 데 가서 칼 들고 고생하느니 돈 몇 푼 주고 따뜻한 방안에서 시나 읊으며 보내는 게 낫다는 것이 송나라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돈 맛은 북방 민족의 침략 의지만 고조시켰고 결국 송은 남쪽으로 밀렸다 1279년 마지막 황제 조병이 자살함으로써 망하고 말았다.
러시아와 서방의 싸움은 숫자로 보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러시아 GDP가 작년 2조 달러인데 비해 유럽 연합은 20조, 미국은 30조에 달한다. 첨단 기술과 군사 장비도 아마 서방이 우세할 것이다. 그럼에도 서방이 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싸움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앵커리지에서 미러 정상이 만나고 백악관에서 미국과 유럽,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모였지만 달라진 것은 미국의 러시아 경제 제재 압박이 사라진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푸틴이 싸움을 그만둘 생각이 없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자신이 이기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또 그 이유는 서방의 전투 의지가 약함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에서 1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별 국민적 저항이 없다. 푸틴 독재 체제가 견고한 탓도 있지만 다수 러시아인이 ‘위대한 소련 제국의 부활’이라는 대의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건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단 한 명의 자국민 사상자가 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두둑한 복지 혜택에 몇달씩 유급 휴가를 .갈 수 있는데 굳이 우크라이나까지 가 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앵커리지에서 보여준 푸틴의 서방을 향한 눈매는 송나라를 바라보는 징기스칸의 눈과 닮아 있다. 살찐 돼지를 바라보는 굶주린 늑대의 눈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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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