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에세이] 라일락 향기를 두른 롱펠로우

2025-08-13 (수) 12:00:00 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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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라일락 사이로 노란색 저택이 수채화처럼 다가온다. 꽃향기에 취해 들어선 이곳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 장군이 참모들과 작전을 논의하던 본부였고, 이후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가 45년간 거주한 ‘크레이기 하우스’다. 문(文)과 무(武)의 역사를 모두 품은 이 저택은 미국 건축사의 대표 양식인 조지안 스타일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단정하면서도 우아하다.

롱펠로우는 하버드 재직 시절 이 집의 2층 방에 세 들어 살다가, 장인으로부터 결혼 선물로 집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장녀 앨리스가 최대한 원형을 보존했기에 지금도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1층 서재에 들어서면 <에반젤린>을 집필한 책상과 그의 흉상이 먼저 눈에 띈다. 긴 수염과 진중한 눈빛, 그리고 책장 속 노란 표지의 단테 『신곡』 번역판이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롱펠로우는 8개 국어에 능통했고, 문학계의 인사들과 함께 ‘단테 클럽’을 만들어 1864년부터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사실주의 작가 윌리엄 하월스, 시인 로웰, 이상주의자 찰스 노턴 등 당대 지식인들이 함께한 이 모임을 통해 『신곡』은 영어권에서 가장 뛰어난 번역본으로 평가받았고, 책은 첫해에만 4쇄를 찍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기도 하다.


<마을 대장장이>의 육필 원고도 서재에 전시되어 있다. 흐릿한 필체 속에서 시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커다란 편지봉투를 여는 칼과 가족의 초상화들이 따뜻한 가족애를 전하며, 특히 아내 프랜시스가 사용하던 거실에는 그랜드 피아노와 샹들리에, 그리고 친구 에머슨의 『자연』이 먼지를 쌓은 채 놓여 있다. 이곳은 문인과 정치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사교의 중심지였다. 소설가 호손, 작곡가 줄리아 워드 하우, 정치가 찰스 서머 등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인물들이 이 집에 모여 문학과 시대를 이야기했다.

롱펠로우는 호손에게서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에반젤린>을 집필했다. 결혼식 날,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영국군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사랑하는 연인과 생이별한 여인의 이야기다. 에반젤린은 미 대륙을 떠돌다 마침내 연인을 찾지만,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아내를 잃은 시인의 슬픔과 겹쳐져, 한 편의 장송곡처럼 깊은 여운을 남긴다.

2층에는 롱펠로우 부부의 초상화가 서로 마주 보는 각도로 걸려 있다.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7년간 왕복 두 시간을 걸어다녔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집에는 고통의 그림자도 깃들어 있다. 아내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봉인하다가 촛불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고, 그 불길은 그녀의 드레스에 옮겨 붙었다. 아내는 결국 화상으로 세상을 떠났고, 롱펠로우는 얼굴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수염을 기르게 되었다.

정원으로 나서면 느릅나무와 사과나무, 바이올라, 백합, 데이지, 그리고 보랏빛 라일락이 향기를 흩뿌린다. 시인은 사과나무를 인생의 스승이라 했다. 매년 새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그는 삶의 가능성과 회복을 배웠다. 라일락 향기 속을 걷다 보면 그의 대표작 <인생 찬가>가 떠오른다.

“기꺼이 이룩하고 추구하면서/ 수고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자.”

완벽한 행복은 없지만,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던 그의 삶이 이 집 곳곳에 살아 있다.

<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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