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백구와 힘겨루기

2025-08-07 (목) 12:00:00 박연실 수필가
크게 작게
백구는 옆집 개이다. 녀석 이름을 몰라 나는 백구라 부른다. 그렇다고 털이 온통 백설기처럼 흰 것은 아니다. 흰 바탕에 검은 털이 물결 흐르듯 등에서부터 배까지 감싸고 있다. 귀는 쫑긋하게 서 있고 눈동자는 갈색이다. 주인과 함께 산책하러 나가는 모습이 장군처럼 늠름하다.

아침에 마당으로 나서면 다가와 짖는다. 우리가 이웃하고 산지 여러 해 되었지만, 녀석은 마주칠 때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여간 까칠한 녀석이 아니다. 처음에 컹컹 몇 번 짖고 계속 짖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반가운 인사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옆집과 면한 담장에 웃자란 무궁화 가지를 쳐내고 뻗어 나간 덩굴장미를 정리하느라 녀석과 한참 대결했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잡초도 뽑았다. 백구는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짖어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눈을 맞춰 보았다.


백구가 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왜 매사에 까칠해” 나는 깜짝 놀라서 백구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가끔씩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마당을 서성이던 내 모습을 본 모양이다.

녀석은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백구에게 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목소리를 높였다. “까칠하게 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 녀석이다, 너는 그냥 넘어가도 될 일에 종일 짖잖아” 하고 대꾸했다. 녀석은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백구는 나의 속을 뒤집어 놓고 멀찍이 가서 바닥에 두 다리 뻗고 누웠다.

갑자기 백구에게 한 소리 듣고 나니 반박할 궁리를 찾느라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나는 규칙을 지키며,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며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 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영화배우가 자신의 얼굴을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든가, 대학 수석 입학자가 잘 것 다 자고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어본 이래로 백구의 망언은 내게 충격이었다.

절대로 백구의 말이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헛소리라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종종 마당에서 씩씩거리며 화를 삭인 것은 사실이다. 녀석에게 이유 없이 화풀이한 적도 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괜스레 헛기침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백구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한 방 맞은 느낌이다. 너그러움과 편안함은 옆집 개에게나 줘 버린 나는 호불호가 분명해졌다. 축구는 재미있고 야구는 지루하다. 커피믹스는 좋고 아메리카노는 더 좋다. 쑥갓 향은 좋지만, 고수는 아직 힘들다. 약속은 잘 하지 않지만 기다리는 것은 잘한다. 비행기 소음은 견딜 수 있지만 못 부르는 노래는 참을 수 없다.

나는 보기보다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세상 이치를 터득하여 만사 가볍게 여기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수행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가당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도 쉽지 않아 늘 하던 대로 하게 된다.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강하게 집착하게 되어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다. 그래서 더 신중히 선택하고 집중하게 된다.

더는 백구의 놀림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자신은 없다. 아무래도 백구에게 진 느낌이다.

<박연실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