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살 때 누님과 형들이 학교와 직장을 찾아 떠나자, 남은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5살 된 동생 넷이 남았다. 밤이면 칠흙같은 어두움이 깔렸다. 그 어두움 못지않게 무서움이 나와 동생에게 있었다.
우리와 함께 사는 새 어머니였다. 마치 어느 이야기책에 나오는 계모와 같았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척 했지만 우리는 불편한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새 어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집안팎 청소와 온갖 잡일을 시켰다.
해 놓은 것이 맘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시켰다. 배고픔과 학대에 견디다 못한 어린 동생은 집을 나갔다.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나는 용기가 없어 집을 뛰쳐나가지 못했지만, 누군가 나를 데려다 다른 집에 입양이라도 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있었다.
동생이 집을 나가고 동네에 소문이 퍼지자 아버지는 나를 서울 큰 형 집으로 보냈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한 친구가 생일날 집에 초대했다 그를 따라간 집은 호화스럽지 않았으나 친절하고 상냥한 그의 어머니와, 잘 차려진 생일상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이렇게 멋진 생일상을 차려 줄까? 내 어머니도 친절하고 정이 많을까?”
누님들의 얘기로는 내가 어렸을때 어머니는 고열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니 어머니의 모습은 기억에도 없다. 어찌된 일인지 사진 한 장도 없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나 이야기도 없으니 그리워 할 일이 없다. 내 생각에도 없으니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는 아득한 먼 나라의 전설 같은 이야기다.
어린 초등학교 시절 유일한 기쁨은 방학 때 고향 산외면 외가 집에 가는 일이었다. 장터에 내려 초등학교를 지나고 푸른 소나무 동산을 휘돌아 들어서면 할머니가 사는 외가 집이 보인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할머니!”부르면 “어이구 내 강아지!”하며 버선발로 달려 나오신다.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인다. 당시에는 할머니가 왜 우시는지 몰랐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할머니가 제일 슬피 울었다고 누님들이 말한다. 아마도 나를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우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다.
“할머니 우리 어머니 어떻게 생겼어요?”“남아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 궁금해요”
할머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네 큰 누님이 어미를 닮았다”하신다. 이후부터 어머니의 모습이 큰 누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님을 본다는 것은 어머니를 보는 것이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자리에 큰누님이 있었다. 먼 후일 안 일이만, 나는 큰 누님의 젖을 먹고 자랐다. 나 보다 좀 늦게 태어난 조카가 있었는데, 태어나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 우리 집 사랑채에 함께 살던 누님이 젖을 물려주었다. 조카 대신 내가 젖을 차지하고 먹었다.
고등학교 때 몹시 앓던 일이 있었다. 몸은 퉁퉁 부어올랐고 죽을 것만 같았다. 큰 누님은 어느 누구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어머니 같은 기도 덕분에 소생 할 수 있었다. 학생 시절 개학을 앞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큰 누님이 사는 반곡리를 떠날 때, 십리 길을 함께 배웅해 주었다. 떠나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로 손을 흔들어 주던 내 어머니 같던 큰 누님의 기억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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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뉴저지 릿지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