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집으로 부치는 편지

2025-05-06 (화) 08:05:49 김성식 스프링필드, VA
크게 작게
사내의 나이가 마흔이 되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마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 시를 읽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뭐 이상한 일도 아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쓰던 어느 새벽이었다. 확인할 것이 있어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조선시대의 한시 하나를 만났다. 16세기 선조임금 시대에 태어나서 17세기 인조임금 시대까지 살았던 문인 이안눌(李安訥)의 기가서(寄家書)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 제목은 ‘집으로 부치는 편지’라는 뜻인데 그가 저 머나먼 북방의 함경도에서 근무하던 중에 지은 시이다.

欲作家書說苦辛 恐敎愁殺白頭親
陰山積雪深千丈 却報今冬暖似春
욕작가설고신 공교수쇄백두친
음산적설심천장 각보금동난사춘
기존에 나온 다른 번역들을 참조하여 재주껏 번역해 보면 이렇다.
집으로 부치는 편지에 괴로움을 말하려다
흰머리 어머니 근심하실까 두려워
그늘진 산 쌓인 눈이 저리 깊어도
되려 ‘올 겨울은 봄인양 따뜻합니다’고 소식 전한다


어명에 의해 부임하기는 했지만 맹추위의 북쪽 변방 겨울을 나는 것이 수월할 리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내는 그대로를 남쪽의 어머니께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늙으신 어머니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곳에 가 있는 아들 생각에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는 것조차 죄스럽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세상 어디에 있든지 항상 잘 있어야 할 아들이 보내온 편지에 지내는 것의 어려움이 적혀 있다면 어머니 가슴이 갈가리 찢어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쌓인 눈이 온 천지에 가득하여도 아들은 ‘어머니, 올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군요. 제 걱정은 마세요.’라고 거짓말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징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내는 사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즉 집을 떠난 자식은 먹고사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부모님께 소식을 전할 때에는 ‘지금 더 할 수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라’고 거짓말을 한다. 부부싸움 후 집안에 얼음장 같은 싸늘한 냉기가 흐르더라도 본가나 친정에서 온 전화를 받을 때에는 ‘저희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건강이나 잘 챙기시라’고 말한다. 어른은 그렇게 말하는 법이다.
굴지의 대기업에 멀쩡하게 다니던 둘째 아들이, IMF 시절에도 해고당하지 않고 넘겨내던 그 아들이, 마흔도 넘긴 나이에 갑자기 미국에 가겠다고 나서니 어머니는 기가 막히셨을 것이다. 몇 달 후 아들은 처자식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넜고 그 후 어머니는 수많은 밤을 걱정으로 지새우셨을 것이다. 따로 여쭙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사정이니 이민 초기의 그 험난한 터널을 지나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릴 때면 항상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도 이 아들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게 아들의 거짓말이 태평양을 넘어가고 그 너머의 어머니는 아들의 거짓말을 믿어주는 척하며 세월이 흘러갔다.

그렇게 흘러가던 나날의 어느 새벽에 이 시를 만났다. 시는 미사일처럼 가슴 한가운데 깊은 곳으로 날아와 꽂힌 후 ‘쿵…’하는 소리를 내며 폭발했고 그와 동시에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나이 쉰을 넘긴 아들은 그 새벽에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난 이 시 앞에서 먼 곳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오래전에 가신 아버지 따라 어머니마저 가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가신지 여러 해 지났건만 그 새벽에 만났던 이 시는 여전히 눈물샘을 진동시킨다. 어머니날이 다가오면 예리한 면도날이 가슴을 긋는 것 같은 아픔이 추가된다.
어머니, 거기서도 여전히 제 걱정을 하시는지요….

<김성식 스프링필드, V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