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 이정(元亨利貞)이라는 천도(天道)의 사계절 원리 중에서 으뜸은 봄이다. 혹독한 겨울을 이긴 동아(冬芽)의 바늘 눈이 트이기 시작하면 어느새 길섶의 쑥도 다북하게 자란다. 꽃 구경을 멀리 갈 것도 없이 길거리나 들 어느 곳에서도 어금버금 피는 눈부신 꽃들로 가득하다.
꽃들은 봄 바람에 향기를 날리고 겨우내 뒷거름 냄새 풍기던 동구 밖 보리밭에는 청보리나 올보리가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꽃이 피고 봄 바람이 불면 장꾼과 화조사(花鳥使)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부잣집 아들이라는 바람둥이 앵두 장사에 속아 누구 누구 집 처녀에게 눈물과 앵혈(櫻血)을 남기고 본체 만체 사라졌다고 윗말 아랫말에 소문이 퍼지고 살이 붙은 이야기는 고개를 넘고 넘는다.
달 속에 산다는 항아(嫦娥)인 선녀도 시기하고 부러워했다는 첫 날밤 앵두빛 흔적이 앵혈이라고 했던가. 앵두꽃이 필 무렵이면 천향국색(天香國色)이라는 모란이 다시 돌아 온 봄을 맞이하기 바쁘다.
사계절을 일흔 번 넘겨 고찰(古刹)이 된 우리 집 모퉁이에서 겨우내 누굴 기다렸는지 동백꽃도 빨간 접시꽃이 되어 부채처럼 피어난다.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내의 무덤가에 핀 꽃이 동백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총명한 정이 없는 한잔 술에 팔고 사는 시간제 계약 사랑들은 동백꽃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까? 앵두와 동백이 꽃샘 바람에 꽃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면 참꽃인 진달래가 지리산에서부터 영변까지 피고 늦 시집을 후회 하듯 연달아 철쭉 꽃이 핀다. 참꽃 진달래에 이어 연달아 피기때문에 철쭉을 연달래라고도 불리운다. 지금은 걷는 길과 운전 하는 길이 지루 하지 않다. 걷다 보면 집집이 피어 있는 꽃을 보면 그 집 주인의 꽃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보여 마음의 본래 습관인 고마움을 느낀다.
아무리 집이 좋아 보여도 한송이 꽃이 없는 집을 보면 빈 집처럼 보이고 잡초만 어웅하여 마음이 스산해진다. 새삼 세상에 꽃을 싫어 하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마음이 생급스럽기만 하다. 꽃샘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 들어도 꽃 포전으로 종종 걸음을 하는 집 사람의 서두르는 발걸음은 첫 장날 초사리 젖을 놓칠세라 장에 가는 촌부(村婦)의 모습과 닮았다. 반찬 거리는 비싸다는 관용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 꽃 모종을 선뜻 선뜻 사들이는 꽃 욕심을 짐짓 못본체 하며 침묵으로 항의하지만 나는 매번 바둑 판 위의 ‘고자 좇’이 되어 이래도 응, 저래도 응이 되어 호랑이 이빨 앞의 하룻 강아지가 된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꽃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아버지는 베풀고 어머니는 키우는 자식처럼 인애(人愛)의 마음과 정성을 들여 핀 꽃을 보면 배는 부르고 마음은 흥부가 톱질을 하듯 내가 꽃이 되고 꽃이 내가 되는 장주지몽(裝周之夢)의 꿈이 된다.
진리는 차별을 하지 않듯 꽃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꽃이 목 마르면 나도 목이 마르다. 더위에 꽃들이 지쳐 있으면 내 몸도 오뉴월 쇠불알 늘어지듯 늘어진다. 음양의 섭리로 피어난 꽃 한송이의 참 멋과 참 맛은 한천작우(旱天作雨)가 되어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로 내 마음을 적셔 준다. 부처가 가섭에게 꽃을 흔들어 보이듯 꽃은 겁(劫)과 찰나(刹那)를 흔들어 진리의 시상(詩想)을 나에게 주지만 나는 눈 부처의 예지(豫知)인 오(梧)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그래도 좋다. 내 거문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떠랴. 나는 매일 매일이 생일(生日)이어서 꽃을 마주하고 앉아 마시는 한잔 술의 행복을 오붓하게 즐긴다. 술 잔 속에 을비치는 꽃들의 만다라(曼茶羅) 빛깔을 마실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행복은 별개가 아닌데 평생 해복을 찾아 우주를 몇 바퀴나 돌고 돌았어도 헛발짓만 한것 같아 하 우습고 억울하다.
옛말에 꽃이 좋아야 벌 나비가 꼬인다는 말로 따지면 꽃중의 꽃은 아마도 호박꽃이 되리라. 복숭아꽃 살구꽃은 고향 노래의 단짝이 되었고 신선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꽃으로 태어난 듯 겨울의 독야 백백(獨也白白)하고 독야 홍홍(獨也紅紅)을 자랑하며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 꽃중의 신선이라는 해당화, 절터 연못에 핀 꽃중의 군자라는 연꽃, 앞산 뒷산에서는 뻐꾸기 장단에 산꽃이 피고 만물이 이루어지는 가을 들판에는 들국화가 피는 금수강산은 이제 제충제 섞은 물을 하루에 천 톤씩 뒤집어 쓰는 골프장이 백두 대간의 천리 행룡(千理行龍)마다 말뚝을 박고 깃발을 꽂아 똥수강산이 되어 가고 있다. 태고지민(太古之民)과 시인 묵객은 얼마나 많은 많은 금수강산의 꽃 노래를 했으며 수묵산수(水墨山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먹물을 갈았나. 옛 사람들의 아름답고 깨끗한 풍습이 퇴박을 당하여 전설이 된다는 것은 발전보다는 후생(後生)의 불행이 될 것이다.
돌아 오지 않는 나그네인 세월은 일상의 무심한 평범 속에서 나를 놀라게 한다. 바로 인생의 덧 없음을 실감할 때다. 밤이 짧도록 합환주를 마시며 끓는 물과 뜨거운 불처럼 미친 사랑을 했던 저 여자, 내 어머니에서 나를 인수 받겠다던 당돌하고 야무졌던 저 여자, 어느덧 귀갑(龜甲)을 닮어 가는 등어리와 두 어깨가 살어 온 세상의 무게를 짊어진듯 세월의 덧없음을 느낀다. 서낭당 고개 넘어 무덤가에 핀 할미꽃을 닮으려나. 초 미니에 트위스트 고고 춤으로 광연(狂戀)의 잉걸 불이였던 저 여자의 거북이 등은 꽃 마음 가득한 한송이 해어화(解語花)가 되어 이 봄에도 꽃포를 옮겨 심고 있다.
For Peace and U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