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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

2024-09-22 (일) 09:57:11 윤영순 메리옷쯔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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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고즈넉한 노년의 시간을 무료하게 보낸다는 생각이 들 때는 벌떡 일어나 찾아 보는 곳이 따로 있다.
어느 지방을 가든, 그 지역의 사회문화 수준은 그곳에 있는 도서관 장서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워드 카운티의 밀러도서관이다. 2008년 불어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많은 도서관들이 열람시간을 단축하는데도 과감히 도서관 건물을 증축하여 문자 그대로 “별을 따려는 노력”으로 건물 전체를 새로 단장하였단다.

우선 내부 구조를 보면 방문객으로 하여금 아늑한 분위기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할 만큼 세심한 배려를 하여 잘 지어져 있다. 일층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신간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는 공간 옆에는 키오스크 형태의 신문 열람대가 있고, 그 옆에는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리며 놀 수 있는 꼬마들의 방이, 독서에 지친 눈을 잠간 쉴 수 있는 커피숍을 닮은 아늑한 휴식 공간이 있다.


이층에는 일반 열람실로 학생들, 청장년, 노년층을 위한 열람대가 가즈런히 잘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는 한국서적들도 눈에 띈다. 이층 베란다에는 넓게 트여진 휴식 공간이 독서하다 말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주며 외부 풍경도 더불어 감상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일층에 배열 되어 있는 신간 서적들의 모습에서 이 지역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읽을 수 있는 종교와 정치경제를 다룬 시사, 예능, 스포츠, 미국 건국역사와 남북전쟁, 유럽의 전쟁사, 그리고 세계역사를 바꾼 인물들의 자서전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가 하면, 이차 대전을 다룬 귀중한 책들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중에도 흥미있는 사실은 1939년 전운이 감도는 긴박한 상황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수상이 직접 주고받은 전문은 당시 조셉 케네디 주영 미국대사를 멍청한 사람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결코 유럽이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케네디 대사의 빗나간 언질은 오랫동안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
실제로 루즈벨트는 자신이 미국 역사에 전례가 없는 대통령 3선 출마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 케네디를 의도적으로 주영 미 대사로 “국외 추방”을 했다는 뒷담이 있다.

조셉 케네디는 JFK대통령의 부친이다. 주영 대사로 부임하기 위해 케네디 대사는 루즈벨트 앞에서 “모진 수모”를 겪어야 했다는 일화 역시 그가 얼마나 좌충우돌 상황판단에 둔감했는지 정치사의 한 페이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일층 도서관 서가에 속속 비치되는 신간서적들을 접하다 보면 나치 찬미론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내란, 참혹했던 유럽 전쟁사에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된다.

그 중에도 일차 세계대전은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잘 묘사되어 있듯이 금지된 독가스를 전쟁도구로 사용한 비정한 전쟁상황에서도 이차대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낭만의 여운을 풍기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전쟁이 없었더라면 인간 역사는 어떠했을까? 이 많은 책들이 씌어질 수 있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는 언제나 전쟁이 존재해 왔음을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전쟁에 관한 수 많은 책 속에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크다란 개구리가 책을 읽고 있는 조형물 옆에서 어린 손주를 안고 다정하게 책을 읽어 주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뒤로하고 도서관 문을 나선다. 이 가을에 발 밑에 떨어지는 낙엽을 밟는 것도 좋지만, 몇 권의 신간 서적과 친구처럼 사귀어 보는 것도 노년의 풍성한 여유를 즐기는 한 가지 방편인 것을….

<윤영순 메리옷쯔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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