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개와 고양이를 먹는 아이티 이민자들’ 의 메시지

2024-09-17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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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년 9월 1일 진도 7.9의 강진이 일본 도쿄 일대를 강타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재일 한인들은 지진과 관계없이 학살당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졌고 흥분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일본 경찰은 이를 제지는커녕 방조했고 사망한 조선인은 ‘독립신문’에 따르면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후 100년이 지나 지난 주 열린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루저 도널드는 오하이오 주 스프링필드로 몰려든 아이티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반려 동물인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폈다. 이날 토론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도널드가 가장 열정을 가진 주제는 경제도, 안보도 아니고 자기 집회에 나온 군중 숫자와 이민자였다. 수천만명의 밀입국자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고 있다고 할 때의 그는 열기가 넘쳐보였다.

밀입국자 중에는 범죄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본국의 빈곤과 범죄, 탄압을 피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죽을 고생을 하며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농장과 공사판을 전전하며 미국인들이 하려 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하며 경제에 보탬을 주고 있다.


밀입국자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는 토론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근거 없는 주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공포와 불안, 분노를 느끼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분풀이 대상으로 조선인이 지목됐다면 세계화, 자동화로 인한 공장 폐쇄와 이민자 유입으로 주도적 자리를 잃을까 불안해 하고 있는 백인 중하류층에 아이티 이민자라는 희생양을 던져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널드의 주장은 즉각 사회자에 의해 허위임이 지적됐고 스프링필드 시장과 관계자들에 의해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이 소문의 최초 유포자인 에리카 리라는 이 동네 여성이 자신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들은 얘기라며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이 주장이 극우 유튜버와 JD 밴스나 도널드에 의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아이티 이민자들에 의한 살해 위협이 발생하자 스프링필드 시는 관공서와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스프링필드에 아이티 이민자들이 많아지게 된 것은 공장 폐쇄 등으로 인구와 노동력이 줄자 시 당국이 이민자들을 적극 모집했고 이에 아이티계가 호응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이티 이민자가 늘면서 주택난과 교통난 등 사회 문제가 발생했고 최근 한 아이티 무면허 운전자가 사고로 사람을 치어죽이기까지 해 주민들 감정이 나빠진 상태다. 이런데다 반려 동물을 이들이 유괴해 식용으로 쓴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진 것이다.

이곳 아이티 이민자 수는 최대 2만으로 추산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불법 체류자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위기 상황 국가 이주자에게 주는 임시 보호 자격(TPS) 소지자로 합법 체류자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반이민 감정이 불붙으면 무용지물이다.

도널드는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후에도 오히려 극우 유튜버를 싸고 돌며 음모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 11일 열린 9/11 테러 추모 현장에 그는 로라 루머라는 대표적 음모론자와 함께 나타났는데 루머는 도널드와 전용기를 같이 타고 다닐 정도로 그와 친분이 있으며 최측근의 하나로 분류된다.

‘개 먹는 아이티인’ 루머 확산에 일조한 루머는 9/11 사태가 회교도가 아니라 미국 내부자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자를 데리고 추모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은 진주만 기습 피해자 추모를 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자를 대동한 것과 마찬가지다. 가주 산불이 유대인 레이저에 의해 일어났다는 주장으로 비웃음을 산 마조리 테일러 그린 같은 음모론자도 루머가 도널드의 대선 승리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개탄할 정도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함께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구약 중 가장 중요한 ‘모세 5경’에는 이방인을 박해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하라는 이야기가 52번 나온다. 이방인에 대한 이런 관심은 전세계에서 유대 기독교가 유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나와 있다. “이방인을 박해하지 말라… 너도 이집트에서는 이방인이었다”(출애굽기 22장 20절).

미국인의 조상도 핍박과 빈곤, 차별을 피해 잘 살아 보겠다고 신천지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 중 원주민의 허락을 받고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적어도 이민자와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권력을 잡으려는 도널드를 지지해서는 안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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