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치심이 나를 흔들 때

2024-07-04 (목)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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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운타운 고층 빌딩. 대리석으로 마감한 최고급 건물의 여자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올 때 나는 좀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벽에 걸렸던 화장지 끝부분이 나의 바지 허리춤에 낀 채 어쩌자고 끊기지도 않고 줄줄 풀려나와 긴 복도를 한참 걸어 나오도록 흰 꼬랑지를 이어가고 있었단 말인가. 세상에나! 복도 맞은 편에서 친절한 한 여성이 웃음을 참으며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질기디 질긴 화장지를 계속 끌고 걸었을 지도 모른다.

황급히 꼬랑지를 떼어내며 맨 처음에 든 생각은 ‘몇 명이나 봤을까?’였다.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하이힐 굽 한쪽이 땡강 부러져 버린 들 무슨 상관이랴. 본 사람이 없다면 수치심이 들 까닭도 없다. 하지만 수천명이 지켜보는 얼음판 경기장 한가운데서 피겨 스케이팅 트리플 턴을 하다가 미끄러진다면? 속된 말로 쪽팔린다.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스피닝 아웃’에서는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고 표현한다.

수치심은 참 특별하다. 남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을 감정이다. 비슷한 감정, 죄책감은 어떤가?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고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스스로 느끼는 괴로운 마음이다. 그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일을 했거나 실제로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품었을 때 ‘난 죄인이야!’라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며 괴로워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뿐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재향군인들 가운데는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한 기록들이 자주 보고되고 있다. 대형 기업이 벌인 구조조정에서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은 직장인들 역시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이것도 비슷한 생존자 죄책감이다.


이들이 겪는 죄책감은 때로 몸의 반응으로도 나타난다. 대개는 쉽게 화가 나고 이유 없이 온몸이 아프다. 입맛이 없어지고 체중이 급격히 변하기도 하며 만성적 우울증이나 편집증에 시달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게 여러 심리학 연구 결과로 나와있다. ‘수치심과 죄책감’ 연구의 대가인 준 탱니 박사(조지 메이슨 대학)는 “이들의 불안도는 평균치보다 훨씬 높으며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가정생활의 위기를 겪기도 하고(39%), 친구나 직장 동료 등 사회 관계 전반에서 예전과는 다른 심각한 훼손을 경험하기도 한다(48%)는 설명이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둘 다 자기 평가에 관한 감정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쁘다’는 수치심이다. ‘나는 나쁜 짓을 했어’는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행동의 문제이지만 수치심은 존재의 문제이다. 죄책감은 개선을 통하여 발전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대신 수치심은 존재의 뿌리를 흔든다. 부정적인 행동을 해결하기 보다 오히려 부추길 가능성이 더 높다는데 심리학자들은 의견을 같이 한다.

심리학 수업에서 빼놓지 않고 비디오 교재로 활용되는 디즈니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여러가지 감정을 다루지만 이번 2편에서도 수치심은 탈락됐다. 10대가 된 주인공 라일리에게 새롭게 일어난 네가지 감정은 불안, 부럽, 따분, 당황이다. 수치심은 너무 부정적이라 심리전문가 자문단의 기획회의 이후, 감정 리스트에서 빠졌을 정도로 특히 10대에게 치명적이다.

무인도로 떠나지 않고도, 사람 많은 거리를 쏘다니면서도, 쓸데없이 수치심 안 느끼고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다운타운 빌딩 복도에 설마 나 같은 주책아줌마를 찍은 CCTV는 없었겠지?

www.kaykimcounseling.com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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