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식물을 가꾸며

2024-05-10 (금)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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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로 한동안 소홀히 했던 식물 돌보기에 다시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들이 좀 컸다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보다. 그 틈을 푸르른 것들이 차지했다.

우선 돌보기를 소홀히 해 말라비틀어진 식물 화분들을 과감히 처리하려고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희귀종이라 가격대가 높았던 몬스테라 알보 뿌리가 어느 정도 살아있는 게 눈에 띄었다. 소독한 가위로 상한 줄기와 무른 뿌리는 잘라 내고 내 엄지 손가락만 한 줄기 한 토막이 남았다. 물에 깨끗이 씻어 조그마한 병에 물꽂이를 시도해 본다.

수채화 고무나무는 처음 왔을 때보다 키가 두 배나 컸다. 지지대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곧게 일자로 자란 녀석이 기특해 물을 흠뻑 주었다. 앞으로도 그 이름만큼 수채화 빛깔로 물든 예쁜 잎을 많이 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봄이라 그런가 고사리 종류들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다. 고사리는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분무기로 물을 뿌려 주는데 내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우리 집 식물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폭풍 성장 중이다.

생명력이 좋은 선인장 종류들은 잎만 툭툭 떼어내 물꽂이 혹은 흙꽂이만 해줘도 금방 자라기 때문에 번식시켜 동생네에 많이 입양을 보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생명의 신비와 푸르른 것들이 주는 기쁨과 위안이 넘치길 바라면서 말이다.

애물단지들은 호야 종류들이다. 호야는 키우기 쉽다고 들었는데 조화인 양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랑 별 차이가 없다. 특별 케어가 필요할 것 같다. 아래에 누레진 잎이나 시원찮은 잎들은 과감히 다 떼어 버리고 영양제도 투여해 본다. 해도 더 보라고 볕 잘 드는 위치로 이동했다. 그러자 조화처럼 꿈쩍도 않던 녀석의 잎 때깔이 달라지더니 새잎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이대로라면 올해는 호야 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물을 갈아 주고 아침저녁으로 살피던 몬스테라 알보 노드에서 새하얀 잎이 삐죽하고 나왔다. 너 살아 있었구나.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동료 식집사들과 이 기쁜 소식을 나눴다. 어렵게 다시 새잎을 냈으니 이제 멋진 무늬를 뽐내며 힘차게 자랄 일만 남았다.

새 친구들도 많이 들여왔다. 마켓과 동네 널서리를 들락날락 거리며 키워 보고 싶었던 식물도 새로 많이 들여왔다. 만나기 어렵다는 필로덴드론 핑크 프린세스와 필로덴드론 실버 스워드도 만나 냉큼 데려 왔다. 귀한 친구들이라 그런가 때깔이 남다르게 곱다. 필로덴드론 핑크 프린세스는 분홍빛이 도는 잎들이 어여쁜 공주님의 발그스름한 얼굴 같다. 필로덴드론 실버 스워드는 초록 잎에 은은한 은빛이 도는 게 정말이지 오묘하게 반짝인다. 두 녀석 다 볕이 가장 잘 드는 상석에 모셨더니 금방 새 잎을 내보였다.

식집사 노릇을 하고 있자니 인간 관계도 식물 가꾸기와 닮아 있다.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 곪아 터지기 직전의 관계에는 때로는 과감한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소홀히 했던 인연도 다시금 들여다 보고 안부를 묻고 다가가면 회복할 수 있다. 지금의 관계에만 얽매이지 말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사귀는 일도 인생의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식물이 번식하듯 누군가와의 사귐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귀한 만남들이 늘어나기도 한다.

내가 키우는 줄만 알았는데 이 식물들과 함께 나도 자라고 있었다. 식물로부터 오는 배움들에 나 자신도 새 잎을 내고 또 뻗어 나간다. 적당한 물과 따스한 햇살을 만나 인생의 꽃도 활짝 필테다. 내일은 또 어떤 초록 친구가 쏙 하고 새 잎을 내어줄지 기대되는 하루하루다. 그게 어쩌면 나일지도.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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