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지던트 호텔에 머물렀을 때 가장 좋았던 건 창밖으로 덕수궁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거였다. 낮에 보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야간 개장 시간이 되어 전각마다 조명이 켜지고 은은한 금색 불빛이 창호지를 물들이면 궁은 더없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서울광장에서는 늘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서울 시민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행사를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특히 집회가 있는 날이면 수많은 인파가 모여 마이크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놓고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소음계로 측정해 보지 않아서 몇 데시벨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워서 쉴 수가 없었다. 소음레벨이 10데시벨 증가하면 두 배로 크게 들린다더니 나중엔 고막이 아팠다. 세종대로변에 있는 호텔 투숙객들은 아마도 같은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음을 소음이라고 했던가. 스피커가 찢어질 듯한 그 높은 음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저마다 사연이 있어 그런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환자다 보니 반복해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건 궁이었다. 창가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궁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광장을 가로질러 그곳에 갔다. 시끄러운 궁 밖과 달리, 궁 안은 평행 세계로 이동한 듯 평화로웠다. 궁 밖의 모든 것은 하루가 무섭게 달라지는데, 고궁의 시간은 멎은 듯했다. 대한문, 중화문, 중화전, 준명당, 석어당, 덕흥전, 함녕전, 정광헌, 석조전, 돈덕전, 중명전 등을 천천히 돌다 보면 모든 공간이 누군가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변치 않고 기다려주는 공간이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덕수궁은 추억이 많은 곳이다. 국민학교 때는 그곳으로 소풍을 자주 갔고, 사생대회에 참가해 도화지에 선이 곱고 아름다운 고궁을 담곤 했다. 사춘기 때는 낙엽을 주워 책갈피 속에 가뒀다가 마른 잎이 되면 시를 쓰기도 했고, 친구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해가 저물도록 노래 연습을 하기도 했다. 돌담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지만, 고궁에서 추억은 생생하게 남아 웃게 하고 때론 울게 했다.
사연 없는 궁이 어디 있을까마는, 석어당에 유독 마음이 갔다.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을 가진 2층짜리 전각 앞에 살구나무가 있는데 살구꽃이 피면 수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바람에 꽃비 흩날리는 풍경 또한 장관이다. 400년간 그곳에 뿌리를 묻고 살아온 살구나무는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의 흥망성쇠, 화재, 일제 강점기에 전각이 헐리는 참담한 수난 등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의 총애를 받았고,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보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워서 늙고 주름진 얼굴을 보듬어주었다.
며칠 전엔 미키마우스가 나를 불렀다. 대한제국의 영빈관이었던 돈덕전에서 “미키 in 덕수궁 아트, 경계를 넘어서”라는 디즈니 특별전이 있었다. “디즈니 캐릭터들이 돈덕전을 방문해서 왕실 유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한국 예술가들의 시선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라는 기사에 혹하여 스페셜 티셔츠까지 사 입고 갔는데, 작품 수가 적어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복을 입고 덕수궁을 찾은 미키를 본 것만으로도 설레고 좋았다. 개인적으로 흑요석 작가의 ‘미키장생도’가 인상 깊었다.
어느 시대, 어떤 세력이 궁을 훼손해도 우리 민족은 다시 재건해왔다. 궁에는 우리의 얼과 역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니 전각의 모든 색이 선명했다. 궁은 앞으로 다가올 날들 또한 우리 민족과 함께 할 것이다. 밝고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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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