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프 안의 한국 기행

2024-03-10 (일)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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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굴 바닥서 분단 아픔 느낀 후 산길 끼고도니 아, 멋진 골프코스…

▶ 맛집 투어와 호캉스, 목적 없는 유랑체험

제프 안의  한국 기행
원수 같은 형제
어떤 때 내가 낳은 자식도 미워 죽을 때가 있고 평생을 같이한 형제도 원수 같은 때가 있다. 남북이 그렇다. 같은 혈통, 언어, 한반도안에서 살면서도 세상 그 어느 민족, 어느 나라 보다 원수같이 지내고 있다. 물론 그 근원은 북한의 피 비린내나는 6 25 침략과 만행, 잔혹한 김일성 일가의 독재 체제와 끝 모르는 도발에 남한과 국제사회는 북한을 원수 같은 형제로 여기고 있다. 그 북한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철원에 소재한 제2땅굴로 갔다. 철원에서 버스 안으로 헌병이 들어와서 인원을 점검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헌병 검색이었다. 예전에는 서울서 동두천까지 가는 길에도 헌병 검색이 서너 번이나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의 헌병과 달리 지금의 헌병은 앳된 어린 아이 같았다. 그가 내릴 때 내가 뒷좌석에서 “충성” 하고 외치자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경례를 하고서는 멋쩍었는지 ‘씩’ 웃으며 하차했다. 와이프가 내 옆구리를 ‘꾹’ 찌르며 나지막이 “조용히 좀 해!” 하며 주위를 준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최북단 월정리 역사 안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 라는 빛 바랜 사인 아래 6-25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앙상한 잔해와 아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뼈대만 드러낸 채 같이 누워있어 분단의 서글픈 한을 말한다. “달리고 싶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70년 긴 세월 항상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모습이 남북의 대치상황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지방자치제 시행이후 역사 문화박물관과 같은 시설들이 전국 곳곳에 세워져서 관광객들을 마지하고 있는 점이다. 철원 역 주위는 옛 극장, 양복점, 여관등을 복원하여 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켰으며 가는 곳마다 주민들이 가이드 역할을 친절하게 수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던 열차대신 조용하고 안락한 모노레일이 참혹한 전쟁터였던 소이산 정상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태극기 없는 국기 게양대, 버려진 미군 막사, 가장 약한 고리
하차하여 정상을 향해 오르는데 중턱에 버려진 작은 미군 레이다 기지 막사가 초라한 모습으로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국만리 이 먼 강원도 산골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와야만 했던 그들은 엄동설한에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가파른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니 설국의 철원평야 너머 북녘의 산들이 묵묵히 나를 바라본다. 소이산 정상에 태극기 휘날려야 할 국기 게양대에 국기가 안보였다. 나이 지긋한 가이드는 북한을 자극한다며 태극기 게양을 반대하는 사람들 탓이라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 바람소리만 귓전을 서글프게 때렸다. 내려오는 길에 그 미군 막사를 다시 지나쳤는데 땅바닥에 굳건하게 세워진 전봇대를 지탱하는 쇠고리들이 보였다. 쇠고리를 한 곳으로 모아 고정한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홈디포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호스 클램프(고리)였다.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은 가장 약한 고리라 했던가?


땅굴 바닥에 뒹굴며 체험한 분단의 아픔
철의 삼각지 전투로 유명한 소이산을 뒤로 하고 제6보병사단이 관할하는 제2땅굴에 도착하니 남침 지하 갱도 작전중 장렬히 전사한 8명을 기리는 추모위령비 앞에 서서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묵념을 드렸다. 그 뒤로 태극기, 유엔기, 6사단기가 힘차게 펄럭였다.
머리에 안전모를 착용하고 깊고 가파른 갱도를 내려갔다. 3.5 Km에 이르는 긴 터널 내부는 비좁고 낮아서 고개와 무릎을 숙이고 걸었는데도 자꾸 머리를 천장에 부닥쳤다. 결국 머리를 크게 부딪치고는 갱도 바닥에 나뒹굴며 오른쪽 손목도 삐걱했다. 넘어진 아픔보다 창피해서 얼른 일어났지만 하체와 손목에서 오는 고통은 지속됐다. 한순간의 작은 고통도 힘든데 어둠의 땅굴 속에서 산화해야 했던 고통은 어땠을까? 그 부모 형제들의 고통은 또 어땠을까? 남북경계선 지하 150m에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 라는 푯말이 보였다. 수치심이 밀려왔다.

수치심도 잠시 부르주아의 천국 대한민국으로 귀환
땅굴에서 나와 구비구비 깊은 산들을 끼고 도니 뜬금없이 멋진 골프코스가 나왔다. 아니 이 산골에? 한국인의 골프사랑은 그 누구도 못 말린다. 한참을 달려 포천 이동에 소재한 ‘갈비생각’ 한식당에 들어섰다. 넓은 주차장과 거창한 궁궐을 연상시키는 나무로만 제작한 식당 건축물이 대단했다. 식당은 뒤편으로 눈에 덮인 거대한 산을 끼고 앞으로는 시원한 시냇물이 맑은 한국인의 본 모습 마냥 흐른다. 여름철에 또 한번 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숯불에 구워 먹는 갈비 맛도 대단했지만 지역 특산품인 ‘포천 이동 2막’ 생막걸리가 시원하게 목젖을 타고 넘어가니 땅굴에서 뒹굴던 아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삶의 일상에 안주함이 이렇듯 무섭다.

출가외인
서울로 돌아와서 외가 친척들과 식사를 했다. 친근한 얼굴들이 있는가 하면 50년 만에 보는 얼굴들도 있었고 대학 다닌다는 외 조카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친숙히 여겨져서 용돈을 건네 주는데 잘도 받았다. 핏줄이란 울타리가 없었다면 초면의 남자가 건네는 돈을 덥석 받지는 못 했으리라.
막걸리가 서너 병 비워지자 외사촌 응식이가 선산에 있는 외할아버지 비석이라며 전화기에서 사진 한 장 보여준다. 검은 비석에 외 할아버님 자식들과 배우자들의 이름들이 확연히 보였다. 그 중에는 돌아가신 어머님과 사위인 아버님 이름도 보였다. 초등학교 방학 때 아직 친손자가 없던 외 할아버님 손을 잡고 선산 산소들을 찾아 뵙던 먼 추억이 떠올랐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던 시대의 한 남자로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진을 보여주는 외사촌을 끌어안는데 돌아가신 어머님, 아버님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언제나 될까? 우리 민족 모두 이렇게 서로를 생각해주며 부둥켜 안고 살 날이? 크게 차려 놓은 저녁상 밥알이 목에 메였다. 문의 jahn20@yahoo.com <끝>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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