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읽은명작

2024-02-27 (화) 이광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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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내가 읽은명작

로버트 프로스트.Photo from: Chiasson, Dan.“Bet the Farm. Robert Frost’s Turbulent Apprenticeship.” New

이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구나.
하지만 그의 집은 마을 안에 있어서
내 여기 멈추어 눈으로 덮여가는
그의 숲을 보고 있는 걸 모르려니.
내 작은 조랑말은 이상하다고 여기리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 가까이
농가도 없는 이곳에 멈춰 선 것을
그것도 일 년 중 제일 깜깜한 저녁에.
말은 목에 건 방울을 한번 흔드네
무슨 잘못된 일이 있는지 묻고자.
여타의 소리란 오로지 부드럽게
휩쓰는 바람 소리 눈 송이 내리는 소리.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지켜야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멀다.
(로버트 프로스트 1874-1963·필자 역)


새해 들어 수도 워싱턴과 뉴 잉글랜드를 포함한 미 동부지역에 설경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눈이 온종일 내린 날, 눈 덮인 세상을 보노라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저녁 숲 가에 멈춰 서서’가 떠오른다. 이 시는 1922년에 쓰여져 1923년 Selected Poems에 소개되었다.

이 시의 화자는 눈 내리는 저녁에 말을 타고 숲을 지나다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정을 멈추고 정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든다. 숲의 주인은 따로 있지만 숲과 떨어져 마을 안에 살고 있어서, 그의 숲 가에 서서 화자가 이처럼 황홀한 광경을 감상하고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며 시의 문을 연다.


눈 쌓이는 숲을 배경으로 시의 분위기는 신비롭고 고요하다. 이러한 분위기에 시인은 ‘작은 말’을 등장시킨다. 사람 사는 마을도 아니고 도착지도 아닌 곳에 여정을 멈춘 주인을 이해 못하는 듯 조랑말이 의아하여 달고 있는 방울을 흔들어 정적을 깬다.

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된 조랑말 그 자체가 ‘현실’과 ‘현실적인 삶’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말방울 소리는 정적의 환상에서 화자의 의식을 일깨우는 예시적인 소리로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화자의 의지력에 한 몫을 해주는 소리이다.

마지막 연에서 눈에 덮이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둡고 깊숙한 숲, 마치 블랙홀처럼 화자를 잡아 당기는 마력을 가진 듯한 숲이 주는 환상에서 화자는 현실로 의식을 되 돌린다. 지켜야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아직 멀기 때문이다. 화자의 현실로의 복귀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화자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이다.

화자의 여정은 시인의 인생여정이자 독자인 우리 인생의 여정일 수 있다. 이 시를 쓴 때 (1922) 프로스트는5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과거의 삶을 뒤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고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미래에 대해 생각 했으리라. 아름다운 정경에 잠시 도취했다가 현실을 직면하고 앞으로 가야할 남은 길을 생각하는 화자의 모습이다.

“지켜야할 약속”은 타인과 맺은 사회적인 약속이자 자신과의 약속이기도하다. 그 약속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을 뿐더러 “잠들기 전”에 수 마일 먼 거리를 가야하기에 화자는 유혹에 머무르지않는다. “잠들기 전”이란 실제로 목적지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드는 취침이자 인생의 마지막 즉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스트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의 삶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시골이나 자연 전원을 배경삼아 인간사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시의 제목, “담장 고치기”, “장작더미”, “가지않은 길”, “자작나무”, “불과 어름”, “낙엽 모으기” 등에 나타난 대로, 친숙한 소재를 평범한 일상용어로 다루면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시인이다. 음양과 같은 상반 개념은 우리의 삶과 대자연의 속성 이자 원동력이기도하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자연에 대하여 저항보다는 이해와 타협의 지혜가 제시되어 있는 반면,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설득하지는 않는다. 선택은 자유의지에 맡긴다.

내가 읽은명작

이광미 ●이메일 kwangmi.lee@yahoo.com ●영문학 박사, 한의사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2022)



<이광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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