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깜빡깜빡 기억력은 흉이 아니다

2024-02-27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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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이 총선열기로 뜨겁다. 2년 후 대선의 그림자여서 더 그렇다. 현재로선 여당의 한동훈과 야당의 이재명이 정권수성과 정권탈환을 걸고 맞붙을 공산이 크다. 신데렐라 정치인인 한(51)은 번뜩이는 총기가 무기다. 대선 재수생인 이(60)는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는 칠전팔기의 달인이다. 한동훈은 이를 ‘중범죄인’으로, 이재명은 한을 ‘검찰독재 앞잡이’로 각각 직격한다.

미국인들도 백악관의 수성이냐 탈환이냐가 결정될 올 가을 대선에 관심이 높다.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사이의 2차전이 사실상 확정됐다. 한국과 달리 미국 대선의 주요 이슈는 4년 전과 똑같다. 후보들의 미심쩍은 정신건강 상태, 곧 고령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다. 바이든은 올해 81세로 이미 미국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3살 아래다. 오는 6월 78세가 된다.

바이든은 지난 8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관한 기자회견 도중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을 멕시코 대통령으로 잘 못 말해 구설수에 올랐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라이벌인 니키 헤일리 후보를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으로 착각했고, 심지어 올해 11월 대선에서 자기가 맞붙을 상대가 바이든이 아닌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인 걸로 헷갈리게 말했다.


바이든의 말실수에 면죄부를 준 사람이 한인 2세 허 경(미국이름 로버트)이다. 의사가 아니라 한동훈 같은 검사이고 동갑내기다. 정부요직을 거쳐 워싱턴 DC의 유명 로펌 파트너로 일하던 허 변호사를 메릭 갈란드 연방 법무장관이 작년 1월 특별검사로 임명했다. 바이든이 부통령직을 마친 후 자기 집에 기밀 공문서들을 보관한 것이 징계사유가 되는지 조사하는 게 임무였다.

공교롭게도 허 특별검사는 바이든이 말실수를 한 8일 장문의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바이든이 자택에 기밀문서를 보관한 것은 위법이지만 그가 자신의 부통령 임기연도나 아들의 사망연도를 깜빡거릴 정도로 ‘기억력이 감퇴된 선의의 노인’이며, 검찰조사에 순순히 응했고, 기소돼도 배심으로부터 동정을 받을 것이 뻔해서 형사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기억력 감퇴 노인이라는 말에 바이든이 발끈했지만 트럼프는 더 노발했다. 자신이 지난해 똑같은 혐의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허 검사는 트럼프가 조사를 방해한 게 바이든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뉴욕 태생인 허 검사는 하버드에서 영문학, 케임브리지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스탠포드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를 2017년 메릴랜드 연방검사로 임명한 대통령이 트럼프였다.

바이든과 동년배인 나도 지인들 이름을 곧잘 까먹는다. 시애틀에서 LA로 귀환한 지 4년 남짓한데 거기서 20년간 출석했던 교회의 몇몇 동료 이름이 머릿속에서 깜빡거린다. 줄곧 헌금정리 일을 맡은 탓에 한 장짜리 교인명부를 달달 외웠었다. 까먹은 교인의 이름을 아내에게 물어보려면 그의 생김새와 신상명세를 장황하게 늘어놔야 한다. 치매 초기증세 아니냐는 핀잔도 듣는다.

정신질환 전문가들은 노인들의 깜빡거리는 기억력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위로한다. 뇌세포가 자연적으로 퇴화해 반응속도가 느려졌을 뿐이란다. 사람 이름을 포함한 고유명사를 까먹거나 부모 사망연도, 손자 출생연도 등을 우물거리는 건 치매와 관계없다고 했다. 마켓에 장보러 간 것을 잊어버리고 그 잊어버린 사실도 알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걱정해야할 일이리라고 했다.

오히려 노인들은 인지능력이 줄어드는 대신 오랜 경험에서 터득한 감성지능이 축적돼 젊은이들보다 일을 더 주의 깊게, 더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장점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바이든과 트럼프에겐 듣기 좋은 얘기지만 한국의 두 젊은 잠룡과는 관계없다. 한쪽은 정치경험이 일천한 새내기이고, 다른 쪽은 감성지능과는 담을 쌓고 패거리 처세술만 추구해온 전과 4범이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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