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 오는 결혼식

2024-01-26 (금)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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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결혼식이네. 운전 중인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남편 친구 결혼식에 참석 차 산 마르코스로 향하는 길이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가는 길이 미끄럽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식장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 가든에는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져있었다. 나도 불과 몇 년 전, 날씨 걱정을 하며 야외 결혼식을 준비했던 터라 신부가 날씨 때문에 속상할 것이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세리머니 때에는 비가 잠깐 멈춰 가든의 푸르른 잔디밭 위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멋진 턱시도를 입은 신랑의 결혼 예식이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다.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해 각지에서 많은 하객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신랑, 신부가 진심을 다해 꾹꾹 써 내려간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는 때에는 눈물을 훔치는 하객들도 보였다. 씩씩한 아내와는 다르게 새신랑이 예식 내내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

뒤이어 리셉션이 시작되고 신랑 남동생의 축사가 이어졌다. 싱글맘 아래서 자란 형제라 그런지 형제애가 남달라 보였다. 어린 시절 동생인 자신에게 엄마가 부여한 한 가지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차한 자리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렸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 임무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 항상 주차 위치를 기억하고 나중에 나와서 차를 잘 찾는 데에 집중하던 어린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인 신랑에게 주어진 임무는 동생인 자신을 항상 지키고 챙기라는 것이었다. 나도 남편 없이 나 혼자 애 둘을 데리고 외출할 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녀석들을 감시하느라 진이 빠져봐서 안다. 혼자 아이 둘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대단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형제는 아빠의 빈자리를 서로서로 채워가며 자라왔던 것이다.


애쓰며 키운 큰아들을 장가보내는 자리인 만큼 만감이 교차할 것 같은데 어머니는 강하고 담대해 보이셨다. 남편과 축하드린다고 인사를 드리니 숙제 하나 끝내셨다며 호탕하게 웃으시며 이제 막내아들 하나 남았다고 하셨다. 덕담을 하는 순서에서는 신부가 말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하시며 아들에게 며느리 말 잘 들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렇게 신부 편을 들어주는 현명함을 보이시며 하객들의 큰 박수 갈채를 받았다.

댄스홀이 열리고 기쁜 날을 함께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치는 소리,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이들의 스텝 소리가 한 데 어우러져 식장을 가득 채운다. 행복한 소리들에 어느새 빗소리는 묻혀 버렸다. 시끌벅적한 잔칫날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맡기고 온 아이들이 눈에 밟혀 아쉽지만 남편을 채근해 식장을 조금 일찍 나선다. 누군가의 새로운 앞날을 함께 축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하루였다.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고 했던가. 새로이 가정을 이루는 두 사람의 앞 날이 반짝반짝 맑게 빛나길 기도해 본다.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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